한도 선생은 일본이 군국화로 치달은 기점을 만주사변(1931년)으로 잡았다. ‘세계최종전쟁론’이라는 군국의 전략에 따라 기획된 음모였기 때문이다. ‘세계최종전쟁론’은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의 구상으로, 당시 ‘육군에는 이시하라가 있다’고 할 정도의 천재적인 군인이었다 한다.
‘이승만 국부론’ 주창자들
어느 나라, 어느 시기건 시류(時流)는 있게 마련이다. 시류를 따른다는 게 민초에겐 생존방식을 의미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편승도 있다. 얼마 전부터 슬금슬금 고개를 들고 있는 ‘이승만 국부론(國父論)’도 내겐 그렇게 보인다. 건국 60주년과 보수우파정권의 출범이 겹친 게 안전판 역할을 한 걸까?
워싱턴 교민 1111명이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위한 1달러 헌납 서명증서를 전달했다는 며칠 전 모 신문 기사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위하여…아름다운 1달러’라는 제목이 달렸다. 워싱턴 주 이승만기념사업회장은 “온 국민이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을 존경하는 미국처럼 건국대통령의 공을 높이 살 줄 아는 국가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했다. 인터넷엔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는데…”라는 질문도 떠 있다.
우남(雩南·이승만의 아호)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필요하다. 필자만 해도 그에 대해선 ‘분열주의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전쟁지도자’로서 한국전쟁을 헤쳐나간 그의 리더십은 전쟁 후반기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이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제스나 네루와 같은 대표적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큼 보기 드문 것이었다.
국민에 총부리 겨눈 과거를 아는지
그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이승만 국부론’을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류에 이데올로기까지 버무려 과거를 세탁하고,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군상(群像)이 있는 한 ‘이승만 국부론’은 간단없이 튀어나올 것이다.
걱정이다.
김창혁 교육복지부장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