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비에트 공산당사(黨史)를 1인 절대주의 지배체제에 맞게 극단적으로 왜곡한 교재가 번역돼 한국의 지하운동권에서 널리 읽힌 게 1980년대 초반이다. 소련 땅에서는 이미 1950, 60년대에 이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체제와 결별하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향해 마그마가 끓어오르던 무렵이었다. 그 러시아 인사는 그로부터도 10년이 지난 뒤 그 책을 금과옥조같이 끼고 살던 386운동권 출신들이 한국에서 광범한 세를 형성하고 있음을 목도했다. 그는 “이럴 줄 알았으면 문을 닫지 말걸 그랬다”고 농반진반(弄半眞半) 말했다고 전직 정부 고위직 인사가 전했다.
러시아 인사가 받은 충격은 탈북자들이 남한 땅에 와서 받는 충격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북한에서 대남공작 부서에 근무했던 한 탈북인사는 자신이 제작에 참여했던 대남(對南)선동 책자가 남한의 유명인사 자택 서고에 보란 듯이 꽂혀 있고, 이적행위 피고인의 변호사들이 탈북자들을 ‘배신자’ 취급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생전에 “북한보다 남한이 더 걱정된다”고 한 적이 있다.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이 세계에서 가장 수구·퇴행적인 김정일 정권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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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조승수 대표가 “중요한 현상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진보 정치세력을 포함한 모든 정치세력의 기본적 의무”라며 3대 세습을 비판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진보신당은 2008년 민노당의 종북(從北)주의에 반발해 탈당한 세력이 주축이 돼 결성한 정당이다. 진보좌파의 대표적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도 지난달 30일 “낯부끄러운 3대 세습에 대한 국민의 비판적 시선이 진보진영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면 북한정권의 반(反)역사적 행태에 대해 확실하게 비판적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일 정권의 3대 세습은 ‘위장 진보’와 ‘진정한 진보’를 구분할 좋은 계기를 마련해줬다. 세상 흐름과 담을 쌓은 세계 최악의 독재왕조를 거들어 힘을 보태주는 세력이 전자라면 대한민국 헌법 안에서 보수와 선의의 정책경쟁을 통해 좀 더 풍요롭고 인간적인 삶을 함께 쌓아 나가려는 공존세력이 후자다. 10·3전당대회에서 강령에 있던 ‘중도개혁주의’를 삭제하고 진보 정체성을 강화한 민주당은 민노당 흉내 내기 혹은 민노당 곁불 쬐기와 진보신당처럼 북한 비판을 전제로 한 진보적 가치 추구 사이에 어디에 설 것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