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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 끝난 지 석달, 지금 그곳에선…

입력 | 2010-10-05 03:00:00

빈민가 공터에 체육공원 흑백 화합의 축구 ‘휘슬’




월드컵은 남아공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3일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 다논 네이션스컵 결승전이 열린 요하네스버그 소웨토의 올랜도 스타디움을 찾은 남아공 어린이들의 표정에는 석 달 전 끝난 월드컵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하네스버그=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빈민촌 오렌지 팜에 사는 타비소 타베데 씨(19)는 3일이 일요일이었는데도 새벽에 일어나 외출을 서둘렀다.

이날 소웨토의 올랜도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 다논 네이션스컵 결승전을 동생 두미사미(10)와 함께 꼭 보고 싶었던 것. 경기장은 집에서 50km 정도 떨어져 있고 기차를 타야 해 이들에겐 제법 먼 여행길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경기장에 도착했을 땐 2만5000석의 무료 표가 이미 다 배포된 뒤였고 허탕을 친 수백 명의 아이들이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해 길거리에 앉아 있었다. 침울한 표정이 된 타베데 씨는 “월드컵 이후 축구팬이 더 늘어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사상 첫 월드컵이 남아공에서 열린 지 석 달. 흑백 인종 갈등이 뿌리 깊은 이 나라에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했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그토록 열망했던 월드컵은 이 나라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이곳 소웨토는 과거 백인 정권이 흑인들을 백인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조성한 흑인 집단 거주지로 남아공의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상징적인 지역이다. 1976년 6월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맞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이때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시위 학생 수백 명이 희생당하면서 더욱 거센 저항이 시작됐다.

소웨토 주민이었던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이를 계기로 저항의 전면에 나섰고 백인 정권을 종식시켰다.

일찌감치 스포츠가 가진 화합의 힘에 눈을 떴던 만델라는 빈부 격차와 인종 갈등으로 분열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로 월드컵 유치를 추진했다. 남아공 월드컵이 가져온 변화를 묻자 타베데 씨는 손을 들어 멀리 가리켰다. 단층짜리 간단한 구조물의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거주지인데 그 앞에 꽤 넓은 체육공원이 있었고 잔디 축구장에서는 흑인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예전엔 허허벌판의 공터였는데 월드컵 이후 시 당국이 나서서 체육공원으로 꾸몄다”며 “빈민가의 공터를 공원으로 바꾸는 사업이 한창이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경기장 치안을 맡은 흑인 여성 경찰 마콤베 조세핀 씨(42)는 “남아공 월드컵은 완벽한 대회였다”고 평가했다. 관광객이 예전보다 늘었고 인종 간의 벽도 허물어졌다는 것. 역시 흑인으로 경호업에 종사한다는 라파엘 블레나호누 씨(38)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월드컵을 통해 남아공이 살기 어렵고 위험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보여줬다. 외국인들의 남아공에 대한 인식을 좋은 쪽으로 바꾼 것은 굉장히 큰 것”이라고 말했다.

월드컵이 다른 건 몰라도 남아공 주민의 마음에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심은 것 같았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꿈’이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다는 타베데 씨에게 꿈을 물었더니 “흑인과 백인, 아시아인들이 차별 없이 조화롭게 살며, 저녁식사를 거르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아공 국제유소년축구 우승


한편 경기장 안은 월드컵 못지않은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남아공 월드컵 때는 사상 처음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한 개최국이 되는 오명을 안았지만 세계 40개국이 참가한 이번 다논 네이션스컵 대회에선 어린 남아공 선수들이 결승까지 올라가 스위스를 2-0으로 꺾었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 경기장은 부부젤라 굉음으로 떠나갈 듯했다.

자국 축구 꿈나무들의 우승에 취한 남아공 축구 팬들은 경기장 밖을 나가서 흥겨운 춤판을 벌였다. 흑인들의 집단 가무였지만 백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표를 구하지 못해 경기장 밖에 있던 아이들도 얼굴에 웃음을 되찾고 춤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었다.

요하네스버그=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