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출신으로 정조때 탈춤-검무-놀이 조형물 제작의 달인
양인으로서 탈춤뿐 아니라 검술과 검무에도 뛰어났던 탁문한의 일생은 새로운 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될 만하다. 그가 잘 췄다는 ‘기녀와 노승 춤’과 유사한 장면이 있는 봉산탈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안대회 교수, 문헌기록 통해 특이했던 삶 발굴
정조 시대에 활약한 탁문한은 여느 공연예술가가 천민 출신인 것과 달리 양민 출신인데다가 검술과 각종 조형물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난 장인(匠人)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탁문한은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행하는 공연예술인 나례(儺禮)에서 공을 세운 명분으로 종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품계까지 하사 받았다. 안 교수는 “유교 사회에서 집안의 반대를 물리쳐 가며 탈춤 검술 등에서 재능을 꽃피운 인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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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꾼으로서의 탁문한은 재주가 비범했다. 시인 조수삼(1762∼1849)의 문집 ‘추재집(秋齋集)’에는 ‘탁반두(卓班頭)’라는 호칭으로 그의 명성이 남아 있었다.
“젊어서부터 황진이 춤과 만석중의 노래 및 우스개몸짓을 잘하여 반중의 자제 가운데 그를 따라잡을 자가 없었다. 늙어서 청나라 사신을 영접한 노고를 인정받아 가선대부의 품계를 하사 받았다.”
탁문한이 만들어 1776년 영조 국장 때 사용했던 방상시 탈.
안 교수는 ‘승정원일기’ 등에 나오는 기록을 토대로 그가 본래는 금위영 소속의 군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친형과 조카도 군인으로 활동한 군인 집안 사람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탁문한은 검술과 검무에도 아주 능했다. 심능숙의 문집에는 “어릴 적부터 검무에 능통하여 회오리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검술을 할 줄 알았다. 세상에서는 김광택이 죽은 지 100년 만에 탁문한이 신비한 기술을 터득했다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광택은 당시 신비한 검법과 검무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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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문한이 제작해 1800년 정조 국장 때 사용한 죽산마. 사진 제공 안대회 교수
안 교수는 “탁문한이 사회적 신분제도를 넘어서까지 탈춤에 빠진 것은 그 당시 탈춤 등 대중예술이 서민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공연문화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활동상은 조선 후기 연희문화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