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부르는 복수! 조심하라, 자칫하면 당신이 괴물로 바뀔 수 있다
자, 그럼 우린 어떤 경우에 복수를 할 수 있을까요? 분명 복수의 전제조건은 ‘원한이 맺힐 만큼 나에게 해를 끼쳤을 경우’일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에게 원한이 맺힐 만큼 해를 끼쳤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란 말이지요.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아저씨·악마를 보았다 복수는 다분히 ‘주관적’ 행위란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복수의 악순환’… 교훈 주려는 잔혹 영상은 좋은걸까?
생각해 보세요.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옆 사람이 실수로 내 발등을 세게 밟았습니다. 발톱이 빠질 듯한 큰 통증이 느껴집니다. 이때 A라는 사람은 그 통증의 정도를 두고 ‘나에게 원한이 맺힐 만큼 해를 끼친 것’이라고 곱씹으면서 발등을 밟은 사람의 발등을 똑같이 밟음으로써 복수를 행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B라는 사람은 A와 똑같이 발등을 밟혔지만 ‘혼잡한 지하철에서 실수로 발을 밟을 수도 있지’하고 너그럽게 이해하면서 복수를 실천하지 않을 수도 있단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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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방법도 다분히 주관적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을 한 상대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너야말로 슈렉 뺨칠 정도로 혐오스럽고 지독하게 못생겼어”하고 쏘아붙이는 게 적절한 복수일까요? 아니면 그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겨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자존심 상하는 경험을 안겨주는 편이 합당한 복수일까요? 한마디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에 의해 잃는 치명적인 해를 당한 경우 말이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인강도나 연쇄살인범에게 잃었다면 어떨까요? 이 경우는 ‘당연히’ 범인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을 저지른 범죄자라면 법이 심판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호되게 복수를 해줘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우린 또 다른 쉽지 않은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살인범에게 행하는 복수는 과연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합당한가 하는 문제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간 자이니 당연히 그 자의 목숨도 빼앗아야 한다고요? 뼈저린 고통을 안겨준 살인범이니 한번에 처단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면서 서서히 숨지도록 해야 한다고요? 아, 너무 끔찍한 생각이네요.
생각해 보세요. 그런 잔혹한 복수를 한다면 당초 우리가 증오했던 살인범과 우리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느냔 말이에요. 원인을 제공한 쪽은 살인범이므로 살인범을 살인하는 것은 지탄받지 않아도 될 행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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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란 저서에서 이렇게 갈파했어요. ‘괴물을 쫓는 자는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우린 어떤 경우에 복수해야 하나요? 복수를 하고 안 하고를 결정하는 기준은 뭘까요? 만약 복수를 한다면 어떤 선에서 하는 것이 합당할까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적절한 복수인가요, 아니면 원인제공자는 상대방이므로 받은 것의 백배 천배를 갚아주는 것이 합당한 복수인가요? 만약 백배 천배를 갚아주기로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를 갚아주는 셈이 되는 걸까요?
복수의 기준과 정도는 이렇듯 상황마다 사람마다 달라요. 게다가 ‘복수를 하겠다’는 분한 마음에 복수를 실행하다 보면 당초 자신이 당했던 해악보다 백배 천배로 잔혹한 복수를 실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이를 두고 ‘복수의 딜레마’라고도 해요. 니체가 말했듯 ‘괴물을 쫓다가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꼴’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 사회는 사적(私的)인 복수를 금하고 대신 법이라는 장치를 통해 죄인들을 심판함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단죄(斷罪)하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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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