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뇨 폭우에 녹아내리는 ‘흙벽돌 천년古都’
찬찬 고고유적지의 흙벽돌 성벽 원형은 본래 높이가 10m에 이른다. 왕과 귀족 외에는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기 위해 단 하나의 입구만 뚫어놓은 것이 특징이다. 고요한 옛 왕국의 터를 걷다보면 문득 귀족들이 금 귀걸이와 코걸이를 찰랑거리며 걷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바다에 삶을 내맡겨야 했던 이 왕국의 성벽 곳곳에서는 펠리컨(왼쪽)과 해달, 물고기 같은 해양 관련 생물을 표현한 부조 벽장식을 찾아볼 수 있다. 동그라미 문양(오른쪽)은 조류에 큰 영향을 미친 달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막 해변의 남미 고대문명
1986년 ‘유산’ 등재와 함께 위기유산 리스트에도 올라
천막치고 플라스틱 땜질…예산 모자라 큰 성과 못거둬
바다가 치무왕국에 미친 절대적 영향력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담벼락의 부조 장식물은 펠리컨과 생선, 해달 같은 해양 관련 생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벽에 길게 늘어선 동그라미 형상은 달을 상징하는 문양이라고 했다. 장식무늬 틀에 노릇하게 부풀려 구워낸 과자처럼 양감이 도드라진다. 벽의 이곳저곳을 장식하고 있는 문양 중에는 파도 같은 흐름을 타고 서로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 나열된 물고기도 있었다. “여기 앞바다는 북쪽의 난류와 남쪽의 한류가 서로를 향해 흘러드는 엘니뇨현상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물고기 문양들이 맞서 타는 흐름이 각각 한류와 난류 같죠? 치무인은 그때 이미 엘니뇨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현지 안내원 알프레도 리오스 메르세데스 씨의 설명이다.
먼 옛날 ‘타카이나모’라는 이름의 왕이 뗏목을 타고 북쪽 바다에서 홀연히 나타나 왕국을 건설했다고 믿었던 치무인. 이들에게 바다의 신 ‘니(Ni)’와 달의 신 ‘시(Si)’는 삶을 지배하는 두 기둥이었다. 달이 뜨지 않는 밤이면 달의 신이 악인을 벌하러 갔다고 생각했다. 달이 태양을 삼키는 일식이 일어나면 달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를 벌였다. 화려한 금과 은의 세공품을 만들어 몸을 치장했다. 바로 이곳에서.
전체 넓이가 한때 24km²에 이르던 것으로 추정되는 찬찬 유적지는 현재 14km²의 평지에 내부적 완결성을 갖춘 10개의 성벽 터로 남아 있다. 왕이 죽고 난 뒤 후계자가 또 다른 성을 주변에 세워 새로운 자신의 통치권을 행사한 결과로 보인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분석이다. 찬찬 유적지는 1986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됨과 동시에 위기유산 목록에도 올랐다. 멸망한 왕국을 들쑤신 도굴꾼들의 유적 훼손은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더 심각한 문제는 풍화다. 비라고는 오지 않던 이 지역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흙벽돌이 녹아내리고 있다. 8∼10년 주기로 찾아오던 엘니뇨현상은 기후변화의 여파로 이제 매년 찾아온다. 점점 양이 늘어나는 빗물에 흙벽돌은 금이 가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허물어져갔다. 물이 빠지는 하수 시스템이 없는 옛 왕국은 빗줄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기유산 등재 이후 복구 시도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 현장에는 흙벽돌 유적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곳곳에 천막이 쳐져 있었다. 지금까지 유산 복구를 위해 투자된 자금은 850만 달러. 유네스코 문화유산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전문가들도 수시로 오가며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페루 문화재청은 찬찬 유적지 복구 및 보존을 위한 10년 기한의 마스터플랜을 작성해 시행 중이다. 현재 이곳에 상주하는 복구 인력은 300여 명. 고고학 전문가 15명이 팀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예산 부족은 여전히 큰 걸림돌이다. 2000년에 만들어진 마스터플랜의 집행 자금은 페루 경제가 성장세를 탄 2007년이 돼서야 지원되기 시작했다. 유적지의 상당 부분에는 여전히 값싼 땜질식 처방이 이뤄지고 있다. 흙벽돌을 본떠 위에 살짝 덧댄 황갈색의 플라스틱 벽돌이 대표적이다. 벽의 부조문양이나 마름모꼴 장식 일부에 이 플라스틱 벽돌이 다른 색깔과 질감으로 어색하게 섞여 있다. 엔리케 산체스 페루 문화재청(INC) 트루히요 담당 국장은 “기후변화로 엘니뇨현상이 잦아지면서 폭우 피해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며 “이런 땜질식 처방이라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언젠가는 떼어낼 예정이라는 플라스틱 벽돌의 수명은 앞으로 몇 년일까. 현지 전문가들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짭짤한 바닷바람 섞인 빗물이 멈추는 날까지 어쩌면 계속…. 사라져가는 이 거대한 모래성은 그렇게 환경과의 조용하고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 신전 속에 또 신전이… 베일 벗는 5겹 ‘달의 신전’ ▼
달의 신전 ‘와카데라루나’의 벽에서 발견된 전사들의 부조 문양. 한 손에는 무기를, 다른 한 손에는 방패나 적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트루히요=이정은 기자
페루 ‘찬찬 고고유적지’에서 남쪽으로 8km가량 떨어진 옛 모체왕국(Moche Kingdom)의 터. 이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와카데라루나’는 400∼600년 번성했던 모체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극사실주의로 평가받는 벽 무늬의 묘사가 대표적이다. 어지러울 만큼 벽을 가득 메운 전갈, 뱀, 거미, 새, 고양이 같은 동물 그림은 정밀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신비로운 신전은 아직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앞선 시대의 신전들이 흙벽돌에 갇혀 있었던 덕분에 문양과 색채가 손상되지 않았다는 점에 고고학자들은 주목하고 있다. 마리아 이사벨 미얀 데 치아브라 유네스코 페루 국가위원회 사무총장은 “예산이 부족해 발굴 장비와 연구 등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며 “선진국의 협조로 국제적 차원의 작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사진 트루히요=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