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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전중환]성희롱 예방, 진화심리학에 답 있다

입력 | 2010-07-29 03:00:00


1990년대 말 미국의 슈퍼마켓 체인 세이프웨이는 새로운 고객 서비스를 도입했다. 매장 내 모든 직원은 고객을 보면 반드시 눈을 마주치면서 미소를 지어야 했다. 계산대에서 고객이 신용카드를 내밀면, 계산대 직원은 고객의 이름을 훑어본 다음 웃으면서 “○○ 고객님, 세이프웨이에서 쇼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게 했다. 이 서비스는 뜻밖의 사태를 가져왔다. 여직원이 자기 이름까지 부르면서 미소를 지어주자 상당수의 남성 고객은 여직원이 자신에게 홀딱 반했다고 확신하고 여직원에게 성가시게 치근대기 시작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몇몇 여직원이 세이프웨이를 고소했고 이 서비스는 폐기됐다.

남성은 여성이 그냥 예의상 짓는 눈웃음이나 상냥한 말투를 과장되게 해석해 그녀가 내게 푹 빠졌다고 추론하는 경향이 있다. 단순한 친절인지 성적인 의도인지 애매하다면 남성은 일단 성적인 의도를 읽어내고 본다. 이런 인지적 편향 탓에 성희롱이 종종 심각한 사회문제로 불거진다.

한국 사회에서 성희롱이 끊이지 않는 원인으로 흔히 남성중심적 문화가 지목된다. 남녀의 마음은 원래 같지만 사회화 과정을 통해 남성은 하룻밤 성관계를 추구하게끔, 여성은 현모양처로 처신하게끔 길러진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설명은 불충분해 보인다. 이 설명이 맞는다면 여성에게 정숙을 강요하는 사회화 과정을 지켜본 남성들은 여성의 애매한 언행에 대해 “에이, 틀림없이 저 여성은 매우 정숙할 텐데 내게 성적 신호를 보낼 리 없어”라며 성적 의도를 실제보다 과소평가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화적 시각은 유전적 생리적 문화적 사회적 요인을 통합하는 밑그림을 그려준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수백만 년 전 여성의 성적 의도를 실제보다 과대평가했던 남성들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이들이 여성의 성적 의도를 있는 그대로 추론했던 남성들보다 생존과 번식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자식을 둔 남성의 자식 수가 1000명이 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남성의 진화적 성공은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가능한 한 많이 가질수록 증가했다. 반면에 여성은 평생 낳을 수 있는 자식 수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여러 남성과 성관계를 함으로써 얻는 이득은 비교적 적었다.

여성의 행동에서 성적 의도의 유무를 추론할 때 두 가지 오류가 가능하다. 성적 의도가 실제로 ‘없는데’ 있을 거라고 과대평가하는 오류, 그리고 성적 의도가 실제로 ‘있는데’ 없다고 소심하게 과소평가하는 오류이다.

소심하게 과소평가하는 바람에 여성과의 성관계 기회를 놓치는 일은 우리의 조상 남성들에게 진화적으로 엄청난 재앙이었다. 이 때문에 남성은 비교적 피해가 덜한 선택지로, 여성의 성적 의도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잘 저지르게끔 진화했다.

의학자들은 암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을 얻어서 암을 치료하고 예방한다. 마찬가지로 남녀가 똑같은 행동을 다르게 해석하게끔 진화했다는 과학지식을 활용해 우리 사회의 성희롱 발생 건수를 낮출 수 있을 것이다.

문화와 사회화에만 주목하는 기존 설명은 남녀의 본바탕은 원래 같다고 주장한다. 이런 전제 속에서는 남성이 즐기는 음담패설을 여성도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하리라는 잘못된 인식을 남성들에게 심어줄 수 있고, 이는 성희롱의 실마리가 된다. 남성과 여성은 다르게 진화해 왔다. 남성으로선 웃자고 던진 야한 농담이 상대방 여성에게는 남성이 측량할 수 없는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여성으로선 그냥 공손히 대했을 뿐인데 상대방 남성은 성적인 신호를 잘 접수했노라고 단단히 착각할 수도 있다. 진화된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둔 성희롱 예방 교육을 기다려본다.

전중환 경희대 학부대학 교수 진화심리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