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은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김 이사장은 올해 하서 탄생 500주년(음력 7월 19일)을 앞두고, 하서를 모시는 필암서원(전남 장성) 유림들과 교류를 하다가 이 글을 접했는데 “시대를 뛰어넘는 내용이라 혼자 보기 아까웠다”며 나에게 보내왔다. 이 글에서 하서는 ‘백성 편에 서서 백성 속으로 들어가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고 붙드는 일’이 위정자의 첫걸음임을 강조했다. 이게 민주(民主)다 싶다.
이 글에서 하서는 또 “지위를 믿고 홀로 자존하여 아랫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을까 지레짐작하며 밝은 체하면 가까운 자는 아첨하고 속이며, 먼 자는 태만하고 의심하는 법입니다. 아첨하고 속이면 그름을 알지 못하고, 태만하고 의심하면 거역하게 되므로 결국 아래에서는 죄를 많이 짓고 위에서는 원망을 깊이 삽니다. 이러므로 자존하면 세(勢)가 날로 외로워지고, 독선하면 악이 날로 쌓이게 마련입니다”라고 썼다.
하서는 성균관 유생이던 24세 때 면벽 사색하던 9세 연장의 ‘늦깎이 유생’ 퇴계를 만나 나이도, 출신지역도 뛰어넘는 숙명적 도반(학문의 동지)이 된다. 퇴계는 나중에 하서보다 더 어리고, 출신지역은 물론이고 사상까지 달랐던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1527∼1572) 선생과 경이로운 교류를 한다.
500년 전 퇴계의 고향 안동과 고봉이 태어난 광주(光州)의 지리적 거리는 오늘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득했다. 사람의 수명도 지금보다 짧았던 그때의 26세 연령차는 한 세대 이상의 간격이었다. 성리학의 주요개념인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퇴계와 고봉의 학설은 합치되기 어려웠다.
지역·세대·이념 뛰어넘은 교류
이처럼 논리 싸움이 치열했음에도 이들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결코 잃지 않았다. 퇴계는 임금에게 고봉을 중히 쓰라고 천거했고, 고봉은 임금이 퇴계의 낙향을 만류하지 못해 난감해할 때 “지성을 다해 붙잡으시라”고 청원했다. 퇴계 사후 고봉은 ‘산도 오래되면 무너져 내리고 돌도 삭아 부스러질 수 있지만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라고 자신의 문집에 썼다.
둘은 이견(異見)을 밝히되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표현을 쓰고 호칭에서도 예의를 갖추며 품격을 지켰다. 사단칠정 논쟁은 서로의 주장을 조금씩 양보하는 선에서 끝났으나 그 과정의 학문적 성과는 한국 유학의 이론을 풍부하게 했다.
고봉을 모시는 월봉서원(광주 광산구)에서 지난해 봄에 열린 춘향제(春享祭)에는 퇴계의 종손이 초대돼 초헌관(初獻官)으로 맨 먼저 절을 했다. 퇴계 후손들의 모임인 청수회(靑樹會), 고봉 후손들의 모임인 백우회(白牛會), 퇴계 문하의 큰 학자 죽천 박광전(竹川 朴光前·1526∼1597) 선생 후손들의 모임인 청죽회(靑竹會)는 매년 버스 한 대로 왕래하며 모임을 갖고 선비의 도(道)를 되새긴다. 500년의 시간, 영호남의 공간을 뛰어넘는 교류다.
배려와 포용보다 무시와 배척이 판치고,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보다 남을 얕보고 오만하기 그지없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잊은 듯한 오늘의 정치사회를 보면서 잠시나마 퇴계 하서 고봉 같은 큰선비들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