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와인은 시간이 만들어낸 히스토리 자체가 얘깃거리인 반면 20∼30년 새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신대륙 와인은 품질 인증이 먼저다. 평론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이를 발판으로 시장의 관심을 이끌어 내더라도 이후 이야깃거리를 내놓지 못하면 금세 기억에서 사라진다. 이 점에 있어 ‘ABC’는 좋은 지침을 제공해 준다.
이 지면을 통해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미국에서 ‘ABC’란 ‘Anything But Chardonnay’ 또는 ‘Anything But Cabernet’의 약칭으로 ‘샤르도네 혹은 카베르네 소비뇽만 아니면 어느 와인이든’이란 뜻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와인 애호가들에게 ABC는 ‘오 봉 클리마(Au Bon Climat)’ 와이너리로 더 잘 통한다.
‘캘리포니아의 로마네 콩티’로 불리는 칼레라가 로마네 콩티와의 연관성을 말한다면 ABC는 ‘부르고뉴 와인의 신(神)’ 앙리 자이에와의 인연을 내세워 부르고뉴 와인의 정통성을 강조한다. 정작 부르고뉴에선 잊혀진 역사적 사실까지 찾아내 자신의 와인에 적용시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피노 블랑, 알리고테, 피노 그리를 섞어 만든 와인 ‘힐데가르드’는 샤를마뉴 대제의 부인 힐데가르드가 부르고뉴 코르통 언덕에 이들 화이트 품종을 한번 심어보라고 권유했다는 고사를 찾아서 빚은 와인이다.
ABC의 와인들은 부르고뉴 스타일을 지향하면서도 소비자와 만나는 접점에서는 철저히 미국식을 따른다. ABC의 모든 라벨에는 촌스러울 정도로 큰 글씨로 품종 이름이 적혀 있다. 소비자들이 품종을 보고 쉽게 와인을 고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와인마다 붙이는 애칭은 저마다 의미를 갖게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소비자들이 와인을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ABC의 소유주이자 와인 메이커인 짐 클렌드넨은 로버트 파커처럼 법학도였다가 프랑스 여행을 계기로 와인의 길로 들어섰다. 키가 190cm가 넘는 거구에 장발을 고수하는 그의 외모만 놓고 보면 섬세한 피노 누아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이라기보다 프로레슬러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개성은 ABC가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또 다른 장점이 되고 있다. 최근 CJ제일제당이 막걸리 유통 사업에 진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CJ가 막걸리의 스토리메이커나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크다. 술술 풀려 나오는 이야기를 품은 술이 생명력 또한 길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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