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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소통]제17회 시드니 비엔날레 현장

입력 | 2010-05-25 03:00:00

거리 두고 ‘나’를 보니 ‘남’이 다가오더라

서구 편향 벗고 제3세계 작가도 대거 참가
원주민 민속작품 등 ‘문화적 다양성’ 일깨워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제17회 시드니 비엔날레가 호주 시드니에서 8월 1일까지 열린다. 36개국 166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코카투 섬 등 7개 장소에서 나뉘어 열린다. 중국 작가 차이궈창은 코카투 섬의 버려진 창고에서 자동차를 이용한 설치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시드니=고미석 기자

《버려진 창고 같은 황량한 공간에 자동차 8대가 장난감처럼 공중에 줄줄이 매달려 있다. 차체에 달린 호스에서 불빛이 깜박거리며 색다른 불꽃놀이를 펼친다.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서 화려한 불꽃놀이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중국 작가 차이궈창의 작품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화력발전소의 육중한 기계 사이에 임시 계단이 설치돼 있다. 계단 중간중간에 마련된 라이트박스에는 일본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의 빛을 이용한 드로잉 연작(‘Lightening Fields’)이 담겨 있다. 두 작품은 호주 시드니에서 열리고 있는 제17회 시드니 비엔날레에 선보인 대규모 설치작품이다. 시드니 비엔날레는 베니스, 상파울루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비엔날레. 올해는 일본의 모리미술관장을 지낸 데이비드 엘리엇이 예술감독을 맡아 ‘거리(距離)의 아름다움: 불확실한 시대, 생존의 노래’란 주제로 36개국 작가 166명의 450여 점을 선보였다.》

올해 행사의 특징은 다문화주의를 지향하는 호주의 정체성에 맞춰 서구 중심에서 벗어나 ‘문화적 다양성’을 부각시켰다는 점. 미국의 루이스 부르주아, 빌 비올라, 러시아의 작가그룹 AES+F, 독일의 욘 보크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들과 함께 호주, 뉴질랜드 원주민의 민속예술작품이 당당하게 선보였다. 그 덕분에 전통과 동시대 미술의 만남, 비(非)서구 지역과 서구 문화의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어떤 특정한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올 행사는 현대미술관(MCA), 코카투 섬,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로열보태닉가든 등 도심 속 7개 장소에서 12주간(5월 12일∼8월 1일) 무료로 펼쳐진다. www.bos17.com

○ 전통과 동시대의 만남

시드니 항구에 자리 잡은 현대미술관 앞에는 미국 작가 록시 페인의 은빛 조각 ‘뉴론 2010’이 등장해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옥상정원에 나무뿌리 조각을 선보였던 작가다. 인공 파이프를 용접해 정보와 지식, 경험이 전달되는 신경계를 형상화한 조각은 사유의 공간을 은유한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면 겉에는 구슬, 안에는 바늘이 달린 모자를 통해 미국 식민지 시대의 여성 현실을 풍자한 앤젤라 엘스워스, 인공과 자연을 접목한 작품으로 현실을 빗댄 선사오민, 인체 형상으로 유기적 형태의 도자기를 만든 레이철 니본 등의 작업이 눈길을 끈다.

호주 시드니 명물인 오페라하우스의 야외 공간을 활용한 최정화 씨의 바구니 설치작품.

전시장에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제3세계의 사라져가는 전통을 소재로 삼은 설치, 드로잉, 영상 작품이 다수 나왔다. 특히 나무통에 채색한 호주 원주민의 공예작품들은 한 방을 차지하며 주목받았다. 원래 장례식에서 쓰였던 나무통을 동시대 미술로 새롭게 평가한 것. 미술관 소장품과 신작으로 꾸민 ‘우리는 그들을 해적이라고 부른다’ 섹션은 원주민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대륙 발견’이라고 우기는 서구 역사를 풍자한다.

이곳에서 5분 거리에 자리 잡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는 한국 작가로 유일하게 참여한 최정화 씨의 플라스틱 바구니 설치작품을 선보여 관람객의 관심을 받고 있다.

○ 버려진 섬이 보물섬으로

비엔날레 개최 장소 중 코카투 섬의 전시는 인상적이다. 초창기엔 감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조선소로 쓰였던 척박한 땅이 동시대 미술에 맞는 환상적 전시장으로 재활용됐기 때문.

시드니의 현대미술관 앞마당에 선보인 미국 작가 록시페인의 ‘뉴런2010’.

현대미술관 앞에서 무료 페리를 10분 정도 타고 가면 작은 섬이 나온다. 여기저기 흩어진 공장 건물과 방공호로 쓰였던 토굴까지 섬 전체가 미술관 밖에서 미술을 만나는 보물섬으로 변신했다. 차이궈창과 스기모토는 섬에 어울리는 설치작품으로 작품의 밀도를 높였고 AES+F의 경우 한 건물을 통째로 활용해 스펙터클한 9채널 영상작품을 내놓았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카데 아티아는 발전소의 터빈 홀에 싸구려 지붕을 이어붙인 설치작품을 통해 세계인의 절반 이상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보여주고, 중국 작가 차오페이는 레닌, 마오, 노자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여 이념의 허구성을 풍자했다.

이번 비엔날레는 개념이나 담론을 앞세운 작품보다 역사 정치 사회 문화적 이슈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현실 밀착형 작업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너무 많은 작품을 선보이느라 집중력과 깊이가 떨어진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서구에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한 점과 원주민 예술을 주목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지구가 아름다운 푸른 행성이란 사실은 우주에서 바라볼 때만 알 수 있다. ‘거리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시드니 비엔날레는 우리에게 입력된 사고와 경험에서 거리를 두고 예술작품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라고 일깨워준다.

시드니=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