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시민군 수습위 여성대표 정현애 씨의 ‘온가족 투쟁사’남편은 체포돼 내란죄 복역… 여동생-시누이는 구금시동생-시누남편 시민군으로 “제대로 기억되길 바랄뿐”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여성 대표로 참여했던 정현애 씨가 남편, 시동생, 시누이(왼쪽부터)와 함께 12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았다. 정 씨는 “5·18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를 실현한 우리 모두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광주=박영철 기자
정 씨는 1980년 당시 시골 중학교 사회교사였다. 남편 김상윤 씨(63·지역문화교류재단 상임위원)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됐다가 전남대에 복학한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남편은 광주 동구 금남로 전남도청에서 500여 m 떨어진 곳에서 사회과학 책방인 ‘녹두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녹두서점은 이들 부부의 단칸 신혼방이자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의 사랑방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계엄 확대로 광주에는 7공수여단이 투입됐다. 그날 밤 정 씨 남편을 비롯한 재야인사와 대학생 지도자들은 줄줄이 붙잡혀 보안대로 끌려갔다.
광고 로드중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애국가에 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한 것이다. 당시 방직공장에 다니던 정 씨의 시동생 김상집 씨(55)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 앞에 시민들은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에 치를 떨었다”고 회고했다. 시민들은 총을 들었다. 정 씨 시동생과 나중에 정 씨의 시누이 남편이 되는 엄태주 씨(54)는 시민군이 됐다. 정 씨와 여동생은 계엄 당국의 거짓 선무방송에 맞서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기로 했다. 당시 상황일지를 작성하던 정 씨 등은 ‘들불야학’을 운영하던 윤상원 씨에게 일지를 건넸다. 윤 씨는 ‘투사회보’라는 소식지를 만들어 시내 곳곳에 수천 부씩 뿌렸다.
22일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하고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정 씨는 수습대책위에 여성대표로 참여했다. 주검 수습, 전단 배포, 집회 개최 등의 일을 하면서 그는 마지막까지 도청 사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벌어졌고, 그는 녹두서점에서 시동생, 여동생과 함께 체포됐다.
정 씨와 여동생은 광산경찰서 유치장과 상무대 영창을 오가며 조사를 받았다. 그해 6월 중순에는 정 씨의 시누이 김현주 씨(52)도 끌려왔다. “상무대 영창에서 조사를 받는 남편을 봤어요. 동생 2명에 아내, 처제까지 투쟁에 나선 탓에 남편은 더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정 씨는 “거꾸로 매달려 있던 남편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고 회고했다.
정 씨의 시누이는 연행 3일 만에, 여동생은 구금된 지 34일 만에 석방됐다. 정 씨는 그해 9월 5일 군 검찰로부터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남편이 내란죄로 2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처벌이 가벼워진 것을 정 씨는 나중에 알았다.
광고 로드중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