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원스톱서비스로 일군 ‘기업천국’… 경쟁력 평가 1,2위
이곳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4시경이었는데도 빈 좌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한산한 인근의 세계적인 햄버거 및 치킨 브랜드 매장과는 대조적이었다.
2007년 7월 싱가포르에 처음 진출한 BBQ치킨은 이미 8개의 카페형 매장을 냈다. 연매출도 60억 원에 이른다. 세계 최고 외식 브랜드의 각축장인 싱가포르에서 토종 한국 브랜드가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뜻밖에도 싱가포르 정부의 숨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BBQ치킨의 싱가포르 사업을 총괄하는 박기출 제너시스 아시아퍼시픽 회장은 “맛과 메뉴를 현지화하는 전략이 한류 열풍과 함께 먹혀들었다”면서도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의 도움이 없었다면 인지도가 낮은 우리가 도심 요지에 매장을 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유치 기관인 EDB가 여러 기관을 수소문해 낯선 한국 브랜드를 유명 쇼핑몰에 연결해줘 시장 개척의 가장 큰 장애물인 매장 입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
행정조직, 고객 유치에 최적화 웬만한 글로벌기업 능가
싱가포르와 홍콩은 ‘기업 천국’으로 불린다. 입지와 요소 경쟁력도 훌륭하지만 알면서도 쉽게 따라하기 어려운 투자유치의 전문성과 효율성이 특히 강점으로 꼽힌다.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와 글로벌 컨설팅회사인 모니터그룹이 세계 20개 경제자유구역의 경쟁력지수(FCI)를 평가한 결과에서도 싱가포르와 홍콩은 경쟁 지역을 큰 점수 차로 따돌리며 각각 1, 2위에 올랐다.
○ 알면서도 당하는 탄탄한 실행력
싱가포르는 고객보다 한발 앞서 움직인다.
삼성전자는 2008년 독일 실트로닉과 공동으로 싱가포르에 10억 달러를 투자해 실리콘 웨이퍼 기판 공장을 설립했다. 삼성전자는 당시 반도체용 웨이퍼(반도체 원판)와 같은 정밀 제품 생산에 적합한 진동이 없는 지반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한 지역을 물색하고 있었다. EDB는 국영 부동산 개발 회사와 협력해 삼성전자 측의 조건을 충족하는 최적의 공장용지를 물색해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그 결과 루커스필름 등 콘텐츠 제작사들과 BBC, ESPN 등 유수의 미디어 기업이 싱가포르에 진출했고, 현재 7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미디어 프로젝트에 투자되고 있다.
○ 민간기업보다 더 효율적인 조직
싱가포르와 홍콩의 투자유치 조직은 세계 시장을 무대로 사업하는 글로벌 기업의 조직과 비슷하다. 해외의 기업 고객 유치를 위해 조직이 최적화돼 있기 때문이다. 공급자 시각의 행정조직으로 싱가포르와 홍콩을 따라갈 수 없는 이유다.
500여 명의 투자유치 전문가가 근무하는 EDB는 해외기업이 찾아오기 전에 한발 앞서 움직인다. 세계 21곳의 해외 사무소를 운영하는 글로벌 운영그룹이 해당 지역의 투자유치 유망기업을 선정하면 업종별 전문성을 보유한 10개의 산업그룹이 맞춤형 지원 방안을 마련해 목표 기업의 문을 두드리는 식이다. 이는 지역별 담당부서와 사업별 담당부서가 유기적으로 협력해 성과를 높이는 ‘매트릭스(Matrix) 구조’로 일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EDB의 해외 사무소에만 100여 명이 근무한다.
기업의 전략기획실처럼 장기 전략을 고민하는 ‘두뇌집단’도 있다. 싱가포르의 성장동력을 고민하고 투자유치 전략을 수립하는 신사업그룹, 관련 정부기관과 협력해 투자유치에 필요한 각종 정책을 수립하고 다듬는 기획정책그룹이 EDB의 핵심 브레인들이다.
이달 3일 싱가포르의 번화가인 오처드로드의 대형 쇼핑몰 지하 1층의 BBQ치킨 매장.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인데도 학생과 직장인들로 빈 좌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한국의 낯선 외식 브랜드가 싱가포르 도심에 매장을 낼 수 있었던 데는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의 도움이 한몫했다. 싱가포르=한인재 기자
싱가포르와 홍콩 현지의 전문가들은 “조직 구조만 흉내낸다고 해서 투자유치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끌어올릴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고객 지향적인 사고와 전문성을 갖춘 인적 자원부터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콩투자청 직원은 대부분 민간기업 출신인 데다 영어 중국어를 포함해 3개 언어를 구사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실제로 금융담당 부서장은 GE캐피털에서, 물류담당 부서장은 DHL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베테랑이다. 민간기업에서 일하면서 쌓은 전문적인 지식과 노하우를 살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홍콩투자청 관계자는 “직원을 뽑을 때 부서장급은 해당 분야의 민간부문에서 최소 10년, 매니저급은 5년 이상 근무한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EDB은 최상위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민간기업 현직 임원을 참여시킨다. EDB의 이사회 멤버로도 활동하는 배너지 PWC 회장은 “PWC에서 EDB로, EDB에서 PWC로 수시로 인력이 이동한다. 싱가포르에서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사이먼 갈핀 홍콩투자청장 “中 본토의 中企유치에 온힘” ▼
한국의 경제자유구역 선택과 집중 전략 바람직
사이먼 갈핀 홍콩투자청장(사진)은 10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홍콩의 투자 유치 전략의 키워드를 ‘중국’과 ‘중소기업’으로 제시했다. 세계적인 대기업의 상당수가 홍콩에 진출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고객층의 다각화가 필수적이라는 것.
홍콩투자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홍콩에 진출한 외국기업은 6397개사. 세계 100대 은행 중 69곳이 홍콩에 진출해 있다. 갈핀 청장의 표정에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방심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매년 언론이나 기관에서 선정한 세계 100대 은행 등의 리스트가 나오면 이를 꼼꼼히 체크합니다. 100대 은행 중 아직 홍콩에 진출하지 않은 곳이 어디인지 확인해 해당 지역 사무소와 협업해 투자 유치에 나섭니다.”
금융 분야에서는 더는 유치할 기업이 없어 보인다는 질문에 갈핀 청장은 “만족해선 안 된다.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정색했다.
투자 유치 목표가 결정되면 청장까지 직접 나선다.
갈핀 청장은 투자 유치 목표가 결정되면 투자청 내의 해당 분야 전문가와 함께 유치 대상 기업 관계자를 만난다. 서너 차례 만나서 쉽게 투자를 유치할 때도 있지만 길게는 2, 3년이 걸리기도 한다.
고객과 고객 입장에서 제안을 하고 설명하는 노력도 갈핀 청장이 중요하게 여기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홍콩투자청은 회사 설립에 대한 정보 및 조언을 무료로 제공한다. 예를 들어 홍콩 정부에 내야 하는 법인 설립 서류를 작성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회계사, 법률사무소, 부동산에이전트 리스트를 제공한다. 법인 설립 절차가 지연될 때는 기업을 대신해 담당 정부기관 부서에 전화해 독촉하기도 한다.
갈핀 청장은 “한국 경제자유구역은 모든 산업 분야를 다 커버하려고 하기보다는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골라 집중하는 전략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배극인 미래전략연구소
신성장동력팀장
▽미래전략연구소
조용우 박용 한인재 하정민
김유영 신수정 기자
▽편집국
박희제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