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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 한강-대동강-압록강에서 태동한 한국빙상

입력 | 2010-02-17 13:30:35


1923년 1월 20일 오전 9시 평양 대동강.

추위 속에서도 연광정(조선시대 대동강변에 세워진 정자) 일대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대동강의 결빙 상태가 좋지 않아 수많은 평양 시민들이 경기장 가까이에 가지 못하고 강변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제1회 대동강빙상경기대회가 열린 것.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이 대회야 말로 우리나라 언론기관이 최초로 개최한 빙상대회.

'대동강 연광정 아래의 장관'이라는 동아일보 기사는 이날 대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전 조선의 스케이트 잘 타는 건아가 모여 선수권을 다투는 광경은 참말로 굉장하였는데 전후좌우에 구경꾼이 구름가치 모여 얼음 위에서 살 같이 달리고 번개 같이 뛰는 선수들의 용기를 보며 박수갈채를 마지 아니 하였다."

이날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릴레이 경기. 박유돈-유초 형제, 김원호, 강봉삼의 4인으로 구성된 광성고보 팀이 우승을 해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았다.

이처럼 초창기 빙상대회는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인기 스포츠였다.

우리나라에 스케이팅이 처음 알려졌을 때 그 명칭은 얼음 빙(氷)자와 미끄럽다는 뜻의 활(滑) 자를 써서 빙활 또는 활빙으로 불렸다.

스케이트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 된 것은 다른 스포츠처럼 미국 선교사와 일본 유학생에 의해서였다. 기록에 의하면 황성기독청년회(YMCA) 현동순이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를 통하여 스케이트를 수입하고 서울 삼청동 개천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타본 것으로 되어 있다.

경기를 할 수 있는 최초의 스케이트장은 1912년 용산연병장 앞에 생겼지만 여기는 일본인만이 사용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강과 대동강, 압록강 등 주로 강이나 연못을 이용했다.

최초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한성고보에 다니던 곽한영이, 최초의 피겨 전문선수로는 경성의전 재학생이던 김삼룡이 꼽힌다.

당시 빙상선수는 선택된 사람들만 할 수 있었다. 이는 수입 스케이트 한 켤레 값이 20여원에 달했기 때문. 당시 500여원이면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스케이트 값만 500만원이 넘었던 셈.

스케이트 화 중에는 노르웨이 제 '하겐'이 최고 제품이었고 독일 제 '폴라'나 '베카'도 인기 품목.

이런 상황이니 훗날 조선체육회장을 지낸 윤치호, 빙상연맹 회장을 맡았던 이일 등 지도급 인물들이 해외에서 돌아오면서 스케이트를 구입하여 기술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다.

제1회 대동강빙상경기대회 자극받은 서울의 빙상인들은 1926년 1월 김용구 등의 발기로 국내 최초의 빙상 단체인 서울스케이팅클럽 창립 모임을 갖고 합동훈련을 통해 기술 연마와 정보를 교환하기로 한다.

이 클럽은 만주와의 정기전을 통해 실력 향상을 꾀했고 서울 선수들의 분발에 자극받아 평양, 신의주 등 타 지역 선수들도 경쟁에 가세했다.

이후 한강, 대동강, 압록강을 중심으로 팽팽한 3파전이 벌어지며 한국 빙상 초창기 기반이 다져졌다.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따내며 얼음판에서 가장 빠른 남녀에 등극한 모태범과 이상화.

이들이야말로 큰 강에서 움튼 한국 빙상이 100여 년 만에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다.

권순일 기자 stt7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