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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칼럼/안현진]美CBS ‘굿 와이프’

입력 | 2009-12-17 10:30:00


좋은 아내였던 한 여자에게 닥쳐온 스캔들과 그 뒤의 이야기를 담아낸 법정 멜로드라마 \'굿 와이프\'

꼭 잡은 남녀의 손이 보인다.

두 사람은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는 장소로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아가려는 찰나다. 문이 열리고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지만 축하와 행복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공적자금을 매춘에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은 주(洲) 검사장 피터 플로릭(크리스 노스)과 그의 부인 알리샤(줄리아나 마르굴리즈)는 기자회견장에 서 있다.

'굿 와이프' 파일럿의 첫 장면이다. 매춘은 자신의 과오임을 인정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한점 부끄럼 없다며 가족의 사생활을 지켜달라는 남편의 곁에 선 아내는 시선을 아래를 향하고, 입술은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치욕의 순간에도 아내는 남편의 수트 소매에 붙은 실오라기 하나를 발견하고 떼어 주려한다.

아내의 손가락이 실오라기에 닿으려는 순간, 꼭두각시로 선 무대의 커튼은 내려진다. 기자회견장을 나온 아내에게 남편이 묻는다. "당신 괜찮아?" 대답 대신 남편의 따귀를 후려친 아내는 더 많은 플래시들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들이 그녀의 온몸을 후려칠 문 앞에서 피곤한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굿 와이프'는 좋은 아내였던 한 여자에게 닥쳐온 스캔들과 그 뒤의 이야기를 담아낸 법정 멜로드라마다.

▶부정한 정치가의 가엾은 아내, 법정에 서다

알리샤의 가장 끔찍한 순간을 느린 속도로 잡아낸 화면은 순식간에 6개월 뒤로 시간을 빨리 감는다. 13년 전 남편의 내조와 가족의 뒷바라지를 위해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스스로 포기했던 전업주부 알리샤는 지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대학동기가 창립 파트너인 로펌에서 신입변호사로 일하게 된 첫날이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알리샤가 아직 결혼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피터가 수감된 뒤 가족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아이들은 사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 전학했고, 교외의 주택에서 시내 아파트로 이사했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시어머니가 알리샤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본다. 스캔들은 여전히 뜨겁다. 그리고 그 여진은 알리샤를 휘청이게 할 만큼 매번 새롭고 충격적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알리샤 플로릭"이라고 소개를 하면 사람들은 "그 플로릭인가요?"하고 되묻는다. 머리 모양과 의상은 달라졌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혹은 겪고 있는 알리샤의 멍한 눈동자는 그대로다.

부정한 남편의 곁을 지키는 정치가 아내의 너그러운 용서. 새로울 것 없이 익숙한 그림이다. 멀게는 2004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에서부터 가깝게는 2008년 3월 미국의 황색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뉴욕 주지사 엘리엇 스피처의 사임까지, 일년이 멀다하고 심심치 않게 불거져온 정치 스캔들의 하나일 뿐이다.

정치가의 섹스 스캔들은 시민을 대리하는 일꾼의 윤리적 자질에 문제를 제기하기에 중요한 사안인 동시에, 가십에 굶주린 대중에게 먹잇감을 던져주기 위한 헤드라인으로 손색이 없는 사건이다.

'굿 와이프'는 대중의 먹잇감이 된 한 여자의 삶을 조명하는 동시에, 그 여자의 남편에게 일어난 사건의 내막을 밝히고, 동시에 법정물로서의 역할을 잃지 않는 균형의 미덕을 지녔다. 치정극이면서도 정치물로서의 색깔을 잊지 않고, 멜로드라마이면서도 법정극으로서의 긴장을 풀지 않는다.

균형 잡기로 말할 것 같으면 '굿 와이프'의 많은 배우들이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드라마의 얼굴인 줄리아나 마르굴리즈가 단연 최고다. 'ER'에서 조지 클루니의 애인이자 간호사 역할로 출연했던 마르굴리즈는 13년 동안 '내조의 여왕'으로 살았던 여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사투를, 시선을 떨구고 턱을 약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 훌륭하게 전달한다.

알리샤의 인생은 칼부림과 총성이 없다 뿐이지 전쟁터에 다름 아니다. 조지타운 법대 수석 졸업에 시간당 최고 수임료를 받을 만큼 능력 있는 변호사였다고는 하지만, 강산이 한번 바뀌고 남편은 감옥에 들어가 인생이 뒤집어진 이 여인에게는 허울 좋은 옛 이름일 뿐이다.

대학동기는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어 큰소리 떵떵 치고, 또 다른 파트너 중의 한명인 다이앤(크리스틴 바란스키)은 힐러리 클린턴과 악수하는 사진을 가리키며 "저 여자도 해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위로인지 조롱인지 모를 인사를 건넨다.

몰카로 찍은 사진이 집으로 배달되는가 하면, 스캔들에 연루된 콜걸은 TV 토크쇼에 출연한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이혼 여부를 두고 내기를 하기도 한다.


▶좋은 아내, 좋은 변호사가 되다

늦깎이 신입 변호사의 사회생활이 쉬울 리 없다. 간부가 된 친구가 호의를 베풀어 간신히 일자리 하나 구한 줄 알았는데, 6개월 뒤면 새파랗게 어린 젊은 변호사와 성과를 비교당해 한 사람은 잘려 나갈 판이고, 알리샤 밑에서 조사원으로 일하는 여자는 남편 밑에서 3년을 일하다 해고당한 여자다.

이렇게 출발부터 불안한 알리샤의 새 인생에서 재밌는 부분은 의뢰 받은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알리샤만의 방법이다. 오랫동안 법정을 떠나 있다 돌아온 아줌마 법조인은, 이제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13년 전에는 그저 출세욕 강한 한 남자의 아내이자 능력 있는 변호사였지만, 이제는 고통 받은 아내이고, 노력하는 엄마인 동시에 한층 성숙해진 변호사다. 의욕이 앞서 무조건 들이대는 방식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연륜이 가져다 준 지혜를 활용할 줄 안다. 음료수 캔 하나를 건네며 정보를 알아내고, 사건 현장에 조사원을 보내기 보다는 스스로 찾아간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알리샤는 그렇게 고군분투해서 결혼을 지키려는 것일까? 이혼이라는 쉬운 길을 두고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기를 결정한 알리샤의 속내에 대해 드라마는 순순히 답을 주진 않는다. 오히려 '굿 와이프'가 주력하는 것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여자가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치중한다.

하지만 상황이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 때로는 그 감정의 전달에 더욱 효과적인 것처럼 '굿 와이프'의 간접적인 화법은 매 순간 알리샤의 복잡한 표정과 겹쳐지며 울림을 키운다. 의뢰인의 변호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것과 똑같은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외도 중인 유부녀를 증인석에 세우기 전날, 알리샤의 머리 속은 뒤엉키지만 다음 날 그녀는 판사에게 증인을 요청한다. 피터의 스캔들 뒤 알리샤는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대한 두려움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눈물은 얼어붙었고, 심장은 쿵쾅거리지만 두려워하는 방법도 잊은 듯 하다. 진실처럼 포장된 거짓이 피해자를 만들어내려고 할 때 그녀는 분노하는 대신 냉정을 찾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알리샤는 어머니보다 더 강한 법조인이 되어 활약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밝혀지는 피터의 섹스 스캔들에 숨겨진 진실도 드라마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피터의 스캔들이 정적들의 함정에 의해 불거졌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면서, 처음에는 꽁꽁 얼어있던 알리샤의 마음에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금이 조금씩 그어진다. 정적들의 함정에 빠진 피해자인 동시에, 가족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준 가해자로서의 두 얼굴을 연기하는 크리스 노스 역시 발군이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의 느끼하면서도 미스터리한 "미스터 빅"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한때 자랑스러웠던 가장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의지를 그의 눈빛에서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크리스 노스가 분한 피터이기에 어쩌면 알리샤가 떠나지 못하고 애쓰는 것은 아닐까라는 무책임한 생각이 들 정도다.

매춘과 공적자금유용의 혐의로 검사장직을 사임하는 피터와 기장회견장에서 곁에 선 알리샤


▶섬세하고 잔잔한 법정드라마의 힘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지 못해 고민하는 인간을 그려낸, 그 진정성이 '굿 와이프'를 이끌어 가는 힘이다. 드라마와 인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걸 알고 있기에 TV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현실의 돌파구가 되기도 하지만, 간만에 만나는 이 현실적인 이야기는 그렇기에 더욱 흡입력을 갖는다.

전 세계 인구를 한번에 20분간이나 기절시키는 미스터리도 없고, 하늘을 뒤덮은 가오리 모양의 우주선도 없다. 사건을 묘사하는 순간에도 '굿 와이프'는 로펌의 입장을 고수한다. 사건의 진위보다는 승소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자질구레하고 복잡한 과정이 여과 없이 보여진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도 인과관계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인지 이 잔잔한 법정드라마는 꾸준하게 좋은 시청률을 지키고 있다. 첫 방영 때에 기록한 14만 명이라는 시청자 수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어쩌면 형제 감독인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이 총괄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고, 부부 작가팀 로버트 킹과 미셸 킹이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밀하고 섬세한 '굿 와이프'의 잔잔한 울림은, 피붙이와 살붙이들이 그 숨결을 불어넣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해본다.

안현진 / joey04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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