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대 기자 2인의 ‘발레 도전기’
바쁜 일상에 치여 종종 일상에서 ‘여성성’을 내려놓고 마는 30대 여자가 ‘홀스’ 사탕을 먹고 정신이 버쩍 든 느낌이랄까. 그래, 20대에 사랑을 할 땐 오데트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30대인 지금도, 40대 이후의 미래도 과연 내 안에 오데트가 있을까.
30대인 동아일보 산업부 김선미 기자와 김정안 기자가 성인 발레의 세계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게 된 데는 이런 자각이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알렉산드르 푸시킨). 어쩌면 두 기자는 발레에서 삶의 위안을 찾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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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서울 시내 백화점 문화센터 겨울학기 수강생 모집 시즌이었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사이트에 들어가 강좌 이름에 ‘발레’라고 입력하자 유아와 어린이 영어발레 말고도 성인 발레 강좌 몇몇이 보였다. 주 1회 3개월 과정에 15만 원을 내고 신청한 강좌는 ‘왕초보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로얄 발레’(기초&쉬운 작품). 일단 ‘왕초보’란 말에 안심이 되면서, ‘작품’이란 대목에선 으쓱하는 마음도 솟았다. 단, 화요일 오후 7시 수업은 퇴근이 불규칙한 직업상 엄두를 못 내 가족과 함께할 토요일 오전이란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사진 제공 지니발레아카데미
형지영 강사는 일단 두 다리를 모으고 앞으로 쭉 뻗으라 했다. 발끝을 쭉 뻗었다가 다시 가슴 쪽으로 당기는 발레 전 스트레칭 동작이었다. 두 발꿈치를 붙인 채 발목을 꼼꼼하게 돌리기도 했는데, 종아리 뒷부분이 저릿할 정도로 당겨왔다. 두 다리를 벌리고 상체와 한 팔을 각각의 다리 쪽으로 깊게 숙이자 허벅지 안쪽과 허리 부분이 길게 늘어났다. 늘 구부정한 자세로 노트북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던 내게는 그 어떤 마사지보다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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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일상에서 ‘파 드 부레’
아름다운 탈출을 위해 ‘즈테’
12일 두 번째 수업을 앞두고 강사는 발레 연습복을 사다주는 수고를 했다. 서울 종로의 발레용품점에서 몇몇을 찍어 휴대전화 영상으로 보내준 것이다. 난 자주색 레오타드, 살구색 타이츠와 슈즈, 아이보리색 랩스커트를 골랐다. 가격은 7만9000원.
발레 스트레칭은 여느 피트니스 센터의 스트레칭 수업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큰 벽거울 앞에서 예쁜 발레복을 갖춰 입고 ‘작은 별 변주곡’ 같은 피아노곡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에 좀 더 미학적으로 내 몸에 집중하게 된다. 3개월 동안 배울 작품의 동작을 선보인 강사는 “동작이 느릴수록 몸에 감정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맞다. 감정! 온갖 부산을 떨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 하루 종일 전쟁터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몸과 뇌에 부상을 입는 워킹 맘의 고단한 생활…. 발레가 말없이 가르치는 감정과 엔도르핀은 그 부상을 치유해줄 빨간약이 아닐까. 전업주부든, 워킹 맘이든 아내가 발레를 배우러 주말 오전에 집을 나선다면 이 땅의 남편들은 박수를 쳐 격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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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소녀 마리는 성탄 파티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로 받지만 이를 탐낸 개구쟁이 프리츠의 장난으로 인형은 망가진다. 하지만 마리가 잠든 꿈속에서 호두까기 인형은 멋진 왕자로 변신한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인형과 별 사탕 요정의 화려한 춤들….
독일 작가 E T A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와 쥐의 임금님’을 대본으로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작품, 화려한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기분전환’이라는 뜻으로 줄거리와 관계없이 삽입된 볼거리 춤)이 압권인 ‘호두까기 인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6개월여 다니고 있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지니 발레아카데미’가 12월 작품반으로 호두까기 인형에 등장하는 별 사탕 요정의 춤을 선정했단다.
이곳은 6개월 이상 꾸준히 기본기를 익힌 일반인 수강생들에게 매월 다른 작품을 선정해 가르친다. 지난 해 봄 수강생들은 공연발표회를 통해 그동안 배웠던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화려한 조명 아래 공식적인 발표회가 아니면 어떤가. 관객의 위치를 떠나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으로부터의 유쾌한 탈출이다.
12월 첫 주말 수업. 일주일여 스트레칭을 게을리 해 낑낑대는 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자, 다시 ‘파 드 부레’(pas de bourr´ee·발끝으로 서서 잦은걸음으로 전후·좌우로 가는 스텝),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일반 성인들이 대다수인 서울 마포구 동교동 ‘지니발레아카데미’의 수업 장면. 스트레칭과 바 동작은 발레 기본기는 물론 근력과 유연성을 기르기 위한 필수 코스다. 사진 제공 지니발레아카데미
발레는 하루라도 스트레칭을 하지 않거나 새로 익힌 동작을 반복적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발레를 처음 시작하는 첫 한 달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고비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첫 한 달 동안은 다음 날 아침이 두려울 만큼 여기 저기 당기고 아파오는 근육통으로 ‘계속 해야 하나’를 고민했다. 그럼에도 발레는 뭔가 달랐다. ‘건어물녀’(일에는 열정적이지만 이성에는 흥미를 잃고 귀가 후 트레이닝복 바람에 맥주와 오징어 등의 건어물을 즐기는 미혼여성)가 화두였던 한 해라지만 시간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워킹 맘보다 자유로운 편인 30대 초반 싱글녀들은 뭔가를 열심히 배우려 한다. 황금 같은 여가시간을 ‘방콕’하며 소진할 수는 없지 않나. 나도 발레 전에 요가, 피트니스, 수영 등을 했지만 왠지 이것들은 숙제 같아 따분했다.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주변 동료들은 가끔씩 발레 동작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한다. 이럴 때 위기를 모면키 위한 대답은 “폭풍 속 구멍 뚫린 지붕 아래 젖은 무대에서도 공연한 안나 파블로바는 ‘영원한 전설’이지만 어설픈 아마추어가 하면 서커스”.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 두 달여 꾸준히 발레를 하면서부터는 미세하지만 달라지는 몸의 변화가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전보다 자세가 좋아지고 등에 건강한 근육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별로 차이는 있지만 첫 1년 정도는 토슈즈(토 댄스를 출 때 신는 발레 신발로 끝을 아교로 굳게 한 신발)보다는 일반 발레 슈즈를 신는다. 발끝으로 서서 추는 토 댄스는 근력과 유연성이 요구되는 고난도 동작이기 때문. 또 초보라도 엄지발톱에 자주 보랏빛 멍이 들 각오를 해야 한다.
함께 발레를 배우는 친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신없는 일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몸으로 느끼고 이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만큼 멋진 일은 없지 않아? 테크닉이나 신체적 조건은 전공자가 아니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우린 영원한 아마추어지만 그럼 어때, 내가 행복하면 그만인 걸….”
선뜻 용기 내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이다. 취미 이상의 ‘자신만을 위한 그 무엇’을 갈망하는 아름다운 당신에게 주저 없이 발레를 권한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 프티파, 파블로바, 폰테인… 잊지못할 ‘발레의 전설’ ▼
안나 파블로바(1881∼1931)는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발레리나다. 그녀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러시아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해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영국의 대 발레리나인 마고 폰테인(1919∼1991)도 그녀를 동경해 발레에 입문했다. 국립발레단사(史)에 따르면 파블로바의 명성은 20세기 초 발레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한국에까지 알려졌다. 동아일보(1920년 6월 7일자)에 ‘세계 제일의 무도가’라는 제목과 함께 그녀의 사진이 실릴 만큼 대단했다.
폰테인은 뛰어난 실력 못지않게 로맨스도 유명하다. 17세에 당시 파나마 대통령의 아들인 티토와 사랑하다 헤어졌지만 그로부터 17년 만에 주미 파나마 사절이 돼 발레 공연을 보러 온 티토와 다시 만나 결혼해 40년을 부부로 살았다. 결혼한 지 10년 만에 남편이 정적의 총에 맞아 반신불수가 됐지만 평생 남편을 사랑했다.
전설적 발레리노(남자 무용수) 중에는 바슬라프 니진스키(1889∼1950)가 대표적이다. 프티파 식 고전발레를 뒤집는 모던 스타일 발레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나 29세 때 정신 분열증 판정을 받아 숨질 때까지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현존하는 발레리노 중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61)가 대중적 인기를 누린다. 1966년 불가리아의 바르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키로프(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라는 명예를 뒤로 하고 1974년 미국에 망명했다. 영화 ‘백야’를 비롯해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를 유혹하는 신비로운 연인으로 출연하는 등 예술의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해 왔다.
(도움말: 장선희 세종대 무용학과 교수, 참고자료: 국립발레단의 ‘즐거워라 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