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4일. 한일월드컵 D조 예선 한국-폴란드의 경기가 열린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
5만 4000여 명이 운집한 관중석 속에서 "우 와~"하는 거대한 함성이 터진 것은 전반 26분이었다.
폴란드 진영 왼쪽에서 이을용이 찬 볼이 낮게 깔려 골문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붉은 색 유니폼을 입은 덩치 큰 선수가 달려들며 볼이 땅에 떨어지기 전 절묘한 왼발 발리슛을 날렸다. 그가 찬 볼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주전 수문장이었던 폴란드 골키퍼 예지 두데크의 다이빙을 무위로 돌리며 폴란드 골문 왼쪽에 그대로 꽂혔다.
광고 로드중
골의 주인공은 황선홍(41) 현 부산아이콘스 감독.
그가 터뜨린 이 골이야말로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는 데 기점이 된 결정타였다.
폴란드를 격파한 한국은 미국과 1-1 무승부를 이룬 뒤 포르투갈을 1-0, 이탈리아를 2-1, 스페인을 승부차기 끝에 5-3으로 누르고 4강 위업을 이뤘다.
사실 폴란드 전 이후 한국축구의 승승장구 기세에 가려 황선홍 감독의 이 골은 그늘에 묻힌 감이 없지 않다.
광고 로드중
하지만 필자는 만일 황 감독이 첫 골의 물꼬를 이렇게 쉽게 트지 못했으면 한국축구의 월드컵 4강은 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2002 월드컵의 최고 주역으로 황선홍을 꼽는데 주저 하지 않는다.
그만큼 큰 국제대회에서 첫 골은 첫 승리에 결정적 기폭제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한국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조 추첨에서 B조에 속해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와 16강 진출 티켓 2장을 다투게 됐다.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라는 현역 최고의 공격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존 오비미켈(첼스)의 나이지리아, 데오파니스 게카스(레버쿠젠)가 버티고 있는 그리스와 맞붙어야 하는 한국축구대표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광고 로드중
한국축구는 2002 월드컵 이후 세계 어느 팀과 붙어도 막상막하의 경기를 펼칠 정도로 전반적인 실력이 향상됐다. 하지만 항상 큰 국제대회에서 첫 경기를 제대로 풀지 못해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대형 스트라이커는 일단 체격이 좋아 한번의 몸놀림으로 상대 수비진을 흔들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국제대회 경기 경험이 풍부해 결정적 순간에 득점력이 좋아야 한다.
황선홍 감독은 현역 시절 183㎝, 79㎏의 체격이었다. 여기에 1988년 국가대표가 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1994년 미국월드컵에 출전했으며 2002년 월드컵 전까지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103경기에 출전해 50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현재 한국축구대표팀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산소 탱크' 박지성을 비롯해 '떠오르는 별' 기성용(FC 서울)이 있지만 이들은 대형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미드필더들이다.
물론 187㎝, 83㎏의 이동국(전북 현대)과 183㎝, 70㎏의 박주영(AS 모나코)이라는 대형 스트라이커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2002년 당시의 황선홍에 비해 경험이나 노련미가 떨어진다.
황선홍 감독의 현역시절 별명은 황새였다. 성이 황 씨인 데다 다리가 길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한국축구대표팀은 2010년 6월 12일 오후 8시30분(한국시간) 그리스와 남아공월드컵 첫 경기를 갖는다.
이 경기에서 한국축구의 첫 승리를 이끌 '제 2의 황새'는 누가될까.
거스 히딩크 감독은 황선홍을 '격이 다른 공격수'라는 극찬과 함께 주전으로 기용해 첫 승리의 주역으로 만들었다.
남아공월드컵까지 남은 기간은 6개월. 앞으로 한국축구대표팀 허정무 감독이 가장 고민해야 할 부분이 최전방을 이끌 대형 스트라이커로 누굴 쓰느냐가 아닐까 싶다.
권순일 | 동아일보 스포츠사업팀장 stt7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