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다리는 루저”… 학교까지 병들게하는 키 지상주의
《최근 한 지상파 방송 오락프로그램에 나온 여대생이 “키 작은 남성은 루저(loser·패배자)”라고 발언해 사회적 논란을 빚었다. 사회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키 지상주의’가 한 여성의 입을 통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키로 우열을 가리고, 키 작은 남자들을 사회적 패배자로 몰아가는 사회 분위기는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이미 확산됐다. 키 지상주의로 인한 왜곡된 자화상은 가정과 학교 현장 곳곳에서 포착된다. 키가 ‘권력’이고 ‘능력’이라는 잘못된 인식 속에서 아이들이 상처받고 있다.》
“다리가 짧아 불쌍하다”
피구-배구할 땐 “다른 팀 가라”
가슴 찌르는 말들 예사로
인기척도는 성적-성격? 외모!
키높이 실내화-깔창 등 대박
고가의 성장호르몬 맞기도
이 반의 A 군에게 ‘키 높이 깔창’은 필수품이다. 운동화 속에 3cm 높이 깔창을 깔아야 또래들과 키가 비슷해지는 A 군은 교실에서도 깔창을 깐 운동화를 벗지 않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설계된 노래방에도 A 군은 가지 않는다. 반 정원 35명인 A 군의 반에서 절반 이상의 남학생이 깔창을 사용하거나 가지고 있다.
A 군과 같은 남학생이 적지 않다보니 학교 앞 문구점엔 1cm부터 3cm까지 높이가 다른 깔창이 구비돼 있다. 키 작은 남자친구를 위해 깔창을 선물하는 여학생도 있다.
깔창은 키 작은 남학생들이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선택하는 방법이다. “뭘 먹고 이렇게 안 큰 거니?” “키 좀 커라”는 비난은 차라리 일반적인 경우에 속한다. 짓궂은 여학생들은 “동생처럼 귀엽다”면서 키 작은 남학생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키 작은 친구에 대한 장난은 체육시간 극에 달한다. 전력질주를 해 8단까지 쌓아올린 뜀틀을 넘는 찰라, 철봉에 오래 매달리거나 턱걸이를 하기 위해 철봉을 향해 손을 쭉 뻗는 찰라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다리가 짧아서 불쌍하다” “팔을 다 뻗은 거냐”는 조롱들을 쏟아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예 아프다는 핑계로 체육시간 운동장으로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 발끈한 남학생이 장난을 치는 친구들과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선생님이 진화에 나서도 이런 장난은 잦아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오히려 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학생, 학부모 때문에 선생님들도 조심(?)하는 상황이다. 뒷자리에 앉은 학생이 “키 큰 학생이 앞에 앉아있어 안 보인다”고 말해와 그 학생을 앞자리에 앉히면 “왜 키순으로 앉히느냐”는 학부모의 항의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아이가 상처 받지 않게 키가 작아도 중간쯤에 앉혀 달라”는 민원성 전화도 온다.
사실 키에 대해 자녀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학부모다.
초등학교 6학년 최모 군은 반 1등을 도맡아 한다. 올해엔 전교회장으로 선출됐다. 적극적이고 쾌활한 성격으로 친구도 많다. 올 겨울방학 최 군의 목표는 ‘키 155cm까지 크기’다. 최 군의 어머니 B 씨가 정해준 목표다. B 씨는 최 군에게 “목표를 달성하면 최신 휴대전화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최 군이 시험공부 때문에 오전 1시까지 책을 붙잡고 있으면 어머니 B 씨는 “일찍 자야 키가 큰다”며 공부방의 불을 끈다. B 씨는 아들이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하기 위해 공부방 형광등의 조도를 조절하는 스위치를 ‘최하’ 단계에 맞춰 놓는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둔 엄마 D 씨는 “대입에서 실패하면 재수하면 되고, 못생긴 얼굴은 성형하면 된다. 하지만 키는 때를 놓치면 손 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과 불안심리 때문에 특수를 누리는 산업도 있다. 다리가 길어 보인다는 교복, 걸음을 걸을 때 다리에 꼭 필요한 자극을 줘 성장을 돕는다는 운동화는 폭발적 매출을 기록했다. 일반 실내화보다 5배가량 비싼 ‘키 높이 실내화’도 불티나게 팔린다. 신학기, 방학 때면 키 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성장 클리닉, 한의원, 어린이 전용운동클럽에 학생과 학부모가 몰린다.
한 중학교 교사는 “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학생이 많다보니 신체검사를 할 때도 키만큼은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에서 한 명씩 재고 나오도록 하고 있다”면서 “키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교우관계는 물론 성적까지 하락하는 학생을 보면 세상이 크게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혜진 기자 leehj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