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 기자가 홍익대 미식축구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대1 몸싸움 훈련을 하며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미식축구에서는 상대방과의 몸싸움에서 지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뚫리면 팀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미식축구의 기본정신 가운데 하나는 희생이다.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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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채널이라고는 공중파 2개사의 것밖에는 없던 시절. ‘채널 2번’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은 지루하지 않은 쉼터였다. 토요일 오후의 프로레슬링과 늦은 밤의 ‘19금’ 영화는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추억. AFKN의 매력 중 하나는 그곳이 색다른 볼거리를 주었다는 점이다. 스포츠중계라면 눈에 불을 켜던 시절. AFKN을 통해 본 ‘낯선 전투’는 ‘지루함’과 ‘호기심’이라는 양면적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어느 누구도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은 룰. 주자가 오른쪽으로 도는 지, 왼쪽으로 도는 지도 모른 채 야구를 보는 사람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하지만 경기장을 빼곡히 메운 관중을 볼 때면 ‘대체 왜 열광할까?’라는 의문이 항상 남았다.
미국인들이 제2의 종교라 부르는 미식축구. 그 열정 속에 빠져보기로 했다. 9일 2009서울지역추계리그 우승팀 홍익대학교 미식축구부를 찾았다.
○체격에서 나온 답…‘육탄방어’ 라인맨이 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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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어울리시는데요? 딱 답 나오네요. 라인맨!” 장비관리를 담당하는 이민석(21)의 한 마디에 어깨가 들썩. ‘라인맨이라….’ 유니폼이 잘 어울린다는 말은 듣기 좋은데, 포지션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조 몬태나(52·전 샌프란시스코 49ers)처럼 경기를 지배하는 쿼터백을 하고 싶었다. 아니면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Show me the money”를 외치며 극적인 터치다운을 성공시키는 와이드리시버도 괜찮겠다 싶었다. 하인즈 워드(33·피츠버그 스틸러스) 역시 와이드리시버. 그러나 라인맨 중에서는 이름을 아는 선수조차 없었다.
미식축구는 각 11명씩, 공격팀과 수비팀으로 나뉜다. 공격팀 라인맨은 최전방에서 수비팀을 저지해 공격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돕는다. 농구로 예를 들자면 주로 스크린을 서는 역할. 과격한 신체접촉도 허용 된다는 점이 농구와의 차이다. 라인맨은 주로 공을 들고 플레이하지 않기 때문에 공을 던지는 쿼터백이나, 공을 들고 전진하는 러닝백, 리시버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주 임무가 육탄방어이기 때문에 라인맨은 주로 체구가 크고, 몸싸움에 능하다. 미프로풋볼(NFL)의 라인맨들은 대부분 항공모함 수준. 홍익대 라인맨 이종택(24)만 보더라도 183cm, 107kg의 건장한 체구다. 이종택은 “신입생 때 생면부지의 선배 한 명이 다가와 ‘넌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몸을 타고 났다’며 미식축구부 가입을 권유해 라인맨을 하게 됐다”며 웃었다.
○실전에서 골절은 예사, 심지어 단기기억상실까지
오후 6시. 필드로 나가니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한국의 모든 미식축구팀은 순수 아마추어. 일반부 선수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대학부 선수들 역시 정식운동부가 아닌 동아리 소속이다. 따라서 모든 훈련은 수업이 끝난 저녁시간부터 시작한다. 라이트(조명)는 필수. 주장 하래권(24)은 “‘조명 발’ 받으며 운동하니 더 좋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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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건(24)과의 블로킹 대결. 달려와 맞붙는 순간부터 거구의 탄력이 느껴지며 잠시 아찔했다. 실전에서 골절상은 예사. 손가락 탈구 정도는 부상 축에도 못 낀다. 라인맨 이종택은 전방십자인대 수술만 3번을 했고, 쿼터백 호종명(25)은 쇄골이 부러진 적도 있다. 원도환 코치는 “충돌 후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지 물어봤던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심한 부상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는 엄단한다. 헬멧의 페이스 마스크를 손으로 잡으면 15야드 페널티. 등 뒤에서의 블로킹은 공 전후 3야드, 좌우 5야드 이내에서만 허용된다. 이를 어기면 페널티 10야드다. 4번의 공격 기회로 10야드를 전진해야 하는 미식축구의 경기방식을 생각하면, 무거운 벌칙.
○잘하면 내 탓, 못하면 동료 탓? 희생정신을 배워라
몸을 이리저리 굴린 뒤에야 비로소 공을 처음으로 잡았다. 패스 훈련. 쿼터백은 야구의 투수에 비견될 정도로 팀 내에서 비중이 높다. 2009서울지역추계리그 MVP인 쿼터백 호종명은 “손목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면서 던져야 공이 정확하게 간다”고 했다. 하지만 원포인트 레슨에도 공은 삐뚤빼뚤.
공이 타원형이기 때문에 받는 것 역시 던지는 것만큼 힘들다. 보통 아마추어 선수들의 공이 날아가는 속도는 시속 30∼40마일. 원도환 코치는 “프로선수들은 60마일(약 97km)이상”이라고 했다. 날아오는 공을 잡다 손가락 관절이 삐끗. 결국 쿼터백 도전은 10분 만에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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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짐 캐리 주연의 영화 ‘에이스 벤츄라’가 떠올랐다. 결정적인 필드골을 놓쳐 마이애미 돌핀스의 우승기회를 날린 키커는 이렇게 통탄한다. “내가 잘 못 찬 게 아니야. 홀더가 공을 잘못 놓았다고!” 홀더는 키커가 공을 차기 전 필드에 공을 찍어놓는 선수를 말한다. 선수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홀더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사실. 홀더 핑계를 댔더니 예상대로(?) 원 코치의 반격이 돌아왔다. “기자님 찰 때만큼은 홀더가 완벽했습니다.”
전술훈련이 이어졌다. 선수들은 틈틈이 손목에 찬 ‘play list band’를 바라봤다. 각 전술에 따른 각자의 역할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공을 가진 선수는 한 명이지만 모두가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제가 힘들다고 한 걸음 덜 뛰면 쿼터백, 러닝백이 다쳐요. 그래서 이를 악물 수밖에 없어요. 미국에서는 쿼터백이 라인맨들에게 명품시계도 선물한다잖아요.” (라인맨 이종택)”
동료에 대한 희생에서 자기 포지션에 대한 자부심을 찾는 모습. 순간 라인맨 지목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홀더를 탓하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자기개척과 자기성찰, 자기희생의 미식축구 3대 정신. 그것이 바로 미식축구가 스포츠 이상의 감동으로 북미대륙을 휩쓰는 이유는 아닐까.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