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을 텅 비운 억새는 잠들지 않는다
민둥산은 중국 진시황제릉보다 더 큰 무덤이다. 엎어놓은 둥근 밥사발 뫼이다. 거대한 ‘시루떡 솥’ 즉, 시루봉(甑山·증산)이다.
갈대는 축축하다. 그것들은 늘 강가나 냇가에서 노래를 부른다. 갈대는 풍요롭다. 억새는 황무지나 거친 산비탈에서 자란다. 산마루에서 하늘을 향해 흔들린다. 하지만 결코 갈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억새밭은 아득하다. 잔솔밭을 2, 3곳 지나고, 너덜밭도 두 개쯤 거쳐야 한다. 깔딱고개는 필수코스. 세상의 모든 것은 힘을 뺀 뒤에야 비로소 뭔가가 보인다. 사람들은 이제나 저제나 억새밭을 생각하며 산을 오른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메마른 숲길. 앵글이 답답하다. “휴우∼.” 한숨을 내쉬며 애가 닳는다. 산은 오를수록 점점 하늘이 커진다. 가랑나무(떡갈나무) 잎들이 가랑가랑 한 잎 두 잎 떨어진다.
억새밭은 정상 0.6km 못 미친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봉우리 일대 수십만 평이 온통 은물결이다. 옛날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다. 봄에 산나물을 많이 캐려고 늦가을에 불을 놓아 큰 나무가 모두 타 죽었다.
사람보다 껑충 큰 억새밭. 말라비틀어진 쑥부쟁이와 개망초. 훤칠한 산쑥들도 마른 쑥대머리가 된 지 오래. 오직 억새들만 너울너울 춤을 춘다.
억새밭 너머로 붉은 해가 걸렸다. 한순간 발그레 물든 억새밭. 군데군데 서있는 앉은뱅이 소나무. 문득 그 붉은 바다에 몸을 누인다. 어찔어찔 배가 흔들린다.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이 배는 어디로 가는 배일까. 텅 빈 마른 몸에서 피워낸 은빛 너울. 몸이 흔들릴 때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아슴아슴하다.
‘세상의 끝을 보려고 몰운대에 갔었네/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사랑보다 더 깊은/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네/강물에 투신하는 건 차마 아득한 눈발뿐/몰운대는 세상의 끝이 아니었네…강물은 부드러운 손길로 몰운대를 껴안고/그곳에서 나의 그리움은 새롭게 시작되었네/세상의 끝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었네’ (박정대 ‘몰운대에 눈이 내릴 때’에서)
몰운대 주변엔 소금강 계곡이 있다. 주문진 소금강과는 또 다르다. 그 절벽에도 돌단풍들이 피투성이 몸으로 악착같이 기어오른다. 바위틈엔 연보라 쑥부쟁이 꽃이 뿌리를 박고 있다. 구불텅 소나무가 지악스럽게 버티고 서서 웃는다. 노란 감국꽃이 절벽을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담담하게 꽃을 피워내는 들국화. 거칠고 메마른 땅만 찾아서 둥지를 트는 향기 가득한 감국꽃. 사람은 누구나 벼랑에 뿌리를 박고 산다. 꺼억꺼억 울며, 아픈 다리 질질 끌며 그렇게 한평생 살다간다.
정선=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 트레킹 정보|
◇먹을거리=콧등치기 청원식당(033-562-4262), 곤드레정식 국향(033-563-9967), 황기백숙 산골토종닭집(033-591-5007), 감자붕생이 아라리촌주막(033-563-0050)
◇숙박=락있수다 펜션(010-9081-9387·평일엔 20∼30% 할인), 황토참숯민박(033-562-7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