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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황태훈]철거되는 야구의 역사

입력 | 2009-07-22 02:55:00


비행기에서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도쿄의 풍경은 독특했다. 멀리 고층빌딩부터 2, 3층짜리 건물이 따로 또 같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그 사이로 초록빛 공간들이 빛났다. 지하철 JR 야마노테선을 타고 도쿄 시내를 둘러보면 그 공간은 더 명확해진다. 주택가나 건물 사이로 공원이 보이고 그 속에 야구장과 축구장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들과 직장인들은 방망이를 휘두르고 공을 찬다. 지역 주민의 스포츠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1978년부터 마련한 이런 시설은 수없이 많다.

일본에는 현대식 생활체육 공간뿐 아니라 오래된 경기 시설이 살아 숨쉰다. 프로야구 야쿠르트의 홈구장인 메이지진구구장. 1926년 10월에 세워져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경기장 내부는 칙칙하고 때가 묻었지만 야쿠르트 팬들은 “진구구장이 도쿄돔보다 아름답다”고 말한다. 신구의 조화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흔적이 자꾸 지워진다. 2007년 12월 철거된 ‘한국 야구의 메카’ 동대문야구장. 1925년 10월 경성운동장으로 시작해 1959년 정식 야구장으로 문을 열었다. 김용희(SBS 해설위원), 이만수(SK 코치), 선동렬(삼성 감독) 등 수많은 고교야구 스타를 탄생시켰다. 그런 그곳에 2010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와 공원이 들어선다.

서울시는 동대문야구장 대신 2011년 구로구 고척동에 국내 첫 돔구장을 짓기로 했다. 간이야구장도 5곳이나 조성했다. 오래된 구장 하나를 허물고 새 경기장을 여러 개 세우는 것은 야구 저변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교야구의 함성이 메아리치던 동대문의 추억은 되돌릴 수 없게 됐다.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끝자락에 위치한 장충리틀야구장도 동대문야구장과 비슷한 운명에 놓일 처지다. 서울시는 최근 남산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하나로 장충리틀야구장을 철거하고 2012년까지 대체구장을 지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곳에 녹지와 산책로를 만들어 남산의 자연을 복원한다는 취지다.

동대문야구장에 이어 야구 꿈나무의 산실이었던 장충리틀야구장마저 사라진다면 근·현대를 아울렀던 야구장의 역사는 끊긴다. 1972년 개장된 장충리틀야구장은 2007년 스포츠토토 지원금 등 10억 원을 들여 깔끔하게 리모델링했다. 야구 관계자들은 새로 개장한 지 2년도 안된 야구장을 녹지로 갈아엎겠다는 서울시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와 남산 르네상스는 서울시 민선 4기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다. 동대문운동장은 디자인도시로, 남산은 서울의 허파로 특화한다는 구상이다. 이른바 도심 재창조 프로젝트다.

하지만 동대문야구장이 사라진 상황에서 37년간 유소년 야구를 이끌어온 장충리틀야구장마저 철거한다면 야구 역사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야구장을 체육시설이 아닌 콘크리트 덩어리로 생각하는 서울시의 발상은 ‘자연 복원’이 아닌 ‘개발 논리’에 가깝다.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열린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 구장은 외야와 공원이 연결돼 있다. 장충리틀야구장도 내야나 외야를 녹지와 연결해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한다면 생활체육 공간이 될 수 있다. 무조건 옛것을 허물고 새것을 만드는 게 능사는 아니다. 도심 재창조가 때로는 역사 허물기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황태훈 스포츠레저부 차장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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