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을 많이 내는 측(경제적 강자)은 정부의 기능을 줄이는 데 골몰하고, 세금을 나눠 받아야 하는 측(경제적 약자)은 가능하면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것은, ‘정부’의 핵심 기능이 바로 ‘세금을 거두어 나눠 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민혁명을 거쳐 성립된 서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것이나, 왕조시대에서 시민사회의 성립 없이 바로 민주주의가 이식된 국가 중 상당수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자본’의 관점에서는 세금을 많이 거두고 역할을 키우는 큰 정부를 파이가 커지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길 수밖에 없다. 세상 어디에도 세금을 많이 내고 싶어 하는 자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에 대한 타협점으로 선택한 제도는 정치와 경제의 통제권을 나누는 것이었다. 즉 정부는 외교와 국방, 치안 등의 임무에 주력하고, 경제는 ‘시장’이라 부르는 ‘자율적인 시스템’에 맡겨두는 절충적인 제도를 택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민간은행가들의 연합체이면서도 사실상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이다. 이런 미국의 시스템은 극심한 부의 편차와 자본에 의한 정치지배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그래도 미국의 급속한 발전은 이런 효율적(?) 제도에 기인한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미국 번영의 일등공신이었던 ‘시장주의’가 ‘은행 국유화 논쟁’ 같은 강력한 도전을 곳곳에서 받고 있다. 시장 스스로 요구했던 지나친 시장만능주의가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파국적인 신용위기를 몰고 왔기 때문이다.
미국정부는 현재 ‘은행 국유화’라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을 두고도 가능한 한 우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능하면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하지만 부실 규모가 이미 은행자본금 총액을 넘어선 시점에서 진짜 문제는 현재의 부실이 아니라 부실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미국 은행시스템은 그동안의 질서를 깨고 정부가 은행을 국유화한 다음, 이후 발생하는 모든 부실을 정부가 감당함으로써 비로소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용위기의 해결은 미국정부가 은행 국유화를 선언하는 시점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신용위기의 해결책은 될 수 있을지라도, 경기침체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다. 더더욱 은행 부실을 모두 감당해야 할 정부의 재정파탄, 그로 인한 화폐가치의 희석 등은 일단 제외하고 본다고 해도 말이다.
박경철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