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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1-20 03:00:00


제1부: 나는 장님이 되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남은 눈동자처럼 고독하다

제3장: 사람은 의심하되 로봇은 의심하지 말라

발상을 바꾸는 일은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 누구나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지만 그 전환을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볼테르는 사라의 치켜든 발끝을 올려다보았다.

발가락에 스치기만 해도 갈비뼈가 부러지고 턱이 산산조각나리라.

글라슈트의 격투 기술이 향상된 것은 전적으로 사라의 공이다. 그녀는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택견과 유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전통무술까지 융합한 퓨전 무술 W 솜씨가 탁월했다. 북한산 인수봉 암벽에서 추락하지 않았다면, 83퍼센트를 기계몸으로 교체하지 않았다면, 특별시연합 W 챔피언에 올랐으리라. W협회는 기계몸을 지닌 선수의 공식경기 출전을 금지했다.

볼테르는 학부 시절부터 격투로봇을 다섯 대나 만들었다. 라스트 파이터, 포세이돈, 갓 파더, 와일드 헌터부터 관운장까지. 배틀원 출전이 목표였지만 번번이 초청받지 못했다. 최고 성적은 관운장을 데리고 초청 예비로봇 1순위까지 오른 것이다. 마지막 평가전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긴 턱수염을 잡혔고, 반원을 그리며 거꾸로 떨어져 머리가 꺾이는 바람에 힘 한 번 쏟지 못하고 패했다.

세계 최강 격투로봇의 꿈은 버려야만 할까.

2046년 겨울, 사라가 연구소로 찾아왔다.

12층 연구소 건물은 머리와 팔다리가 떨어져나가고 몸통만 남은 로봇의 토르소를 닮았다. 볼테르의 연구실은 7층 심장 부위에 자리를 잡았다.

사라가 연구소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진열된 로봇들이 소리를 지르고 사지를 흔들어댔다. 그녀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계음과 전파에 반응한 탓이다. 어떤 로봇은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지만 어떤 로봇은 경고음을 냈고 어떤 로봇은 날아올라 덮치기까지 했다. 사라가 재빨리 뒤공중돌기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환대, 감사드려요.”

사라는 당황하지 않고 앞니가 보일 만큼 환하게 웃었다. 로봇들이 다시 열광했다.

사라가 연구실로 들어선 순간부터 볼테르는 똑딱똑딱 초침을 세기 시작했다. 불청객 때문에 귀한 연구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오늘 검토할 격투로봇 관련 논문만도 열일곱 편이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외부인은 연구소 출입이 불가합니다만….”

“사라예요. 서, 사, 라!”

“어떻게 보안시스템을 뚫고 여기까지….”

외부인이 7층까지 오려면 적어도 일곱 차례 신원 확인을 거쳐야 했다.

“흉내를 좀 냈죠.”

“흉내라고 했습니까?”

사라가 손을 들어 연구실 벽에 큼지막하게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사람은 의심하되 로봇은 의심하지 말라!

볼테르가 정한 연구소 표어였다.

사람이 연구소를 나고들 때는 까다로울 만큼 신원 확인과 몸수색을 하지만 로봇은 무사 통과였다. 83퍼센트 기계몸인 사라는 17퍼센트 천연몸을 최대한 감추면서 로봇 흉내를 냈다. 방범용 독빛살이 다가설 때마다 허리를 굽히고 팔을 돌려 기계몸을 내밀었다. W를 연마한 탓에 2분가량 숨을 멈추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심장 박동은 숨길 수 없었지만 이마저도 최근 출시된 신상품 ‘하트(Heart)’ 흉내를 내며 넘겼다. 심장도 뛰고 손목에 맥박까지 잡히는 새로운 스타일의 안드로이드였다. 안드로이드가 사람인 척하는 경우는 있어도 사람이 안드로이드인 척하는 경우는 드문 탓에 보안시스템도 이상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방법을 바꿔보세요. 그럼 이길 거예요.”

사라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방법을 바꾸라고 했습니까? 로봇 격투기를 구경한 적이나 있습니까? 시간 낭비 맙시다. 흥!”

볼테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만 나가주시라고 말하려는 순간, 사라의 오른발 끝이 볼테르의 콧잔등에 닿았다. 볼테르는 그녀가 발을 떼는 것도, 그 다리가 콧잔등까지 올라오는 궤적도 보지 못했다.

“무슨 사기를 친 겁니까?”

“눈속임은 없습니다. 물처럼 흘러갔을 뿐이지요.”

“물처럼?”

“그렇습니다. 물은 온갖 만물을 감싸고 훑고 끝내는 부수지요.”

사라는 그동안 볼테르가 만든 격투로봇들의 파괴력을 우선 인정했다. 그러나 파워를 키운 로봇일수록 동작이 크고 둔탁하다는 약점을 짚은 후, 현재 파괴력을 유지하면서 수비에 능한 로봇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볼테르가 물었다.

“유연하면서도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로봇?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요, 그 로봇이 W만 익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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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은 지면 게재일 전날 오후 2시부터 동아일보 홈페이지(www.dongA.com)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