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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주영의 그림 읽기]쫓겨나 채소만 먹은 소녀는…

입력 | 2008-08-30 02:53:00

‘안녕, 외계인’ 그림=이경석, 비룡소


개구쟁이 소녀는 어느 날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가슴에는 아득한 절망이 켜켜이 쌓이고 입에서는 자신도 모를 욕설이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배가 고파 왔습니다. 들녘에는 무밭이 있고 명주 다래가 있고 감자밭이 있고 밀밭이 있습니다. 우선 무밭으로 뛰어들어 제 팔뚝만 한 무 한 개를 거침없이 뽑아 듭니다. 씻지도 않고 껍질을 벗기지도 않고 흙 묻은 무 한 개를 게 눈 감추듯 삽시간에 어적어적 먹어 치웁니다.

소녀는 냉큼 집으로 돌아갈 명분을 찾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조차 회초리를 꺾어들고 자신을 뒤쫓아 오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소녀의 발걸음은 어느 새 들녘을 지나 산속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조그만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기어 들어가 몸을 숨깁니다. 워낙 피곤했던 터라 금방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밝아오자 소녀는 멀리 바라보이는 명주 다래 밭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채 익지도 않은 다래를 마구 따서 치마폭이 넘치도록 담습니다. 그중 한 개를 먹어 봅니다. 달기보다는 입안이 뻑뻑할 정도로 시금털털할 뿐 아니라, 나중에는 솜덩이만 남아 거칠게 씹힙니다. 그래도 꿀꺽 삼킵니다.

오후에는 보리밭으로 숨어들어 채 익지 않은 보리를 꺾어 불에 구워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고 배추와 양파와 마늘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웁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면서 소녀의 심성은 안정되고 느긋해집니다. 여우나 들개의 울음소리를 듣긴 하였으나, 동굴을 덮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따돌리거나 비난하지 않으며 조롱한 적도 없는 혼자만의 생활이 즐겁기만 합니다.

소녀가 산속으로 숨어들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채식 생활 10년이 지나서 나이가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문득 어릴 적에 쫓겨났던 집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매우 역한 냄새가 풍겨 왔습니다. 그러나 참고 마을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리고 소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은 폐허와 방불하였고,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괴성을 지르거나 절뚝거리며 걷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집으로 찾아갔으나 부모는 물론이고 형제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병으로 몸져누운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김주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