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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한 택일… 예상외 강도… 또 김정일식 ‘도박’

입력 | 2008-08-27 02:56:00



<<북한이 26일 미국에 10·3합의에 따른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요구하며 이미 진행된 핵 불능화 조치의 중단은 물론 원상복귀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나온 것은 시점상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단’의 산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

■ 왜 하필 지금… 北 선언 배경과 의도는

올림픽 끝나고 후진타오 한국 떠난 직후 발표

美민주당 全大 첫날… 전세계 이목 집중시켜

“판 깨기보다 요구조건 관철 위한 벼랑끝 전술”

“차기 美행정부 구성때까지 시간끌기” 해석도


북한이 베이징 올림픽 폐막 다음 날 방한했던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방한 일정을 마친 직후를 택한 것은 중국을 배려하겠다는 계산이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시작일을 택한 점은 미 행정부에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지키라는 요구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전문가들은 북측의 이 같은 행동이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라고 보면서도 북측 조치의 의미와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세 갈래로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임박한 북-미 협상을 위한 ‘벼랑 끝 전술’=사태의 심각성을 가장 낮게 보는 시각은 1992년 제1차 핵 위기와 2003년 제2차 핵 위기 당시 북한이 상투적으로 사용해 온 협상 타결용 ‘벼랑 끝 전술’의 재판이라는 것이다.

사실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이 교착 국면에 이를 때마다 무력시위나 합의사항 불이행 협박 등을 통해 미국 등 상대방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고 향후 협상에서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려 했다. 북한은 올 4월 싱가포르에서 북-미 협상을 갖기 전인 3월 28일 서해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 시각에 따르면 북핵 검증체계 마련과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문제를 놓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미 협상이 타결될 경우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퇴임 전이라도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다.

정부의 한 당국자가 “북한이 원하는 것은 판을 깨는 것이 아니라 검증체계 수립에서 유리한 조건을 관철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다.

▽전략적 실패에 따른 후퇴=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보는 시각은 북한이 지난해 2·13합의 이후 견지해 온 북-미 관계 개선 전략의 실패를 인식하고 부시 행정부와의 핵 협상을 끝내려는 수순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실제 10·3합의에 따라 올 6월 26일 핵 신고서를 제출한 만큼 미국이 약속대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할 것으로 믿었으나 이게 관철되지 않자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것.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이 6개월 이상 핵 신고서 제출을 지연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대선 정국이 시작됐고 미국 내부의 정치 상황 때문에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가 어려워졌다”며 “북한이 자신들이 저지른 전략적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 마지막 수단을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부시 대통령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외교적 성과인 ‘북핵 진전’은 물거품이 되고 미국의 양보가 없는 한 연내 6자회담의 진전은 어려울 수도 있다.

▽핵보유국 지위 확보 위한 포석=북한의 궁극적 목적은 비핵화가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이며 이번 조치 역시 그 일환에서 면밀하게 계획된 조치라는 시각이 있다.

손광주 데일리NK 편집장은 “김정일의 궁극적 목표는 핵무기를 보유한 조건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라며 “이날 조치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차기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가시화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수순”이라고 해석했다.

북한은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인 1998∼2000년에도 북-미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살리지 못했다. 북한은 애초 생존을 위한 ‘시간 끌기’를 하는 것일 뿐 핵 포기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