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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 배낭 속 친구가 되어주는 책 30선]책그림책

입력 | 2008-07-17 03:01:00


◇책그림책/밀란 쿤데라 등 지음/민음사

《“그 순간 나에게는 집의 수도꼭지가 열려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졸졸 흐르는 실개천처럼 물이 새고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결국 염려의 대상이 아니며, 근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책들 속에 나는 자신의 비밀스런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넣어놓았기 때문이다.”(오르한 파무크)》

‘책이란?’ 大家들에 던진 大家의 그림화두

여행 작가 박준 씨가 “손닿는 곳에만 있어도 좋은 책”이라 꼽은 이 책은 독특하다.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글쓴이들이 아니다. ‘크빈트 부흐홀츠’라는 삽화가에 무게중심이 기운다. 시작은 1996년쯤. 독일의 한 출판사가 벌인 기획에서 비롯됐다. 수많은 책 표지를 그려온 그의 그림을 세계 여러 작가에게 하나씩 보낸 뒤 떠오르는 단상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모인 46명의 글들을 그림과 함께 묶은 게 ‘책그림책’이다.

엉뚱한 발상에서 출발했지만 참여한 작가의 면면은 가볍지 않다. 밀란 쿤데라, 수전 손택, 오르한 파무크, 존 버거, 미셸 투르니에, 마르틴 발저…. 그중 한 명만 참여했어도 화제가 됐을 거물들이 ‘올스타전’처럼 등장한다. 시적이면서도 상상력이 가득 찬 책 그림으로 명성을 쌓은 크빈트 부흐홀츠의 힘이다.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은 그의 그림들은 모두 책―일부는 타자기나 종이―이 소재다. 달빛 아래 들판에 커다란 책을 이불처럼 덮은 소년(수전 손택), 푸른 평원 위에 중절모 신사가 잔뜩 쌓인 책 위에 걸터앉은 풍경(밀란 쿤데라), 사다리를 밟고 책 밖으로 튀어나온 책 속의 사내(헤르타 뮐러)…. 환상과 꿈이 뒤범벅된 그림들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에게 책이란, 삶이란 무엇인가.’

대가가 던진 화두에 응한 대가들의 화답 역시 심상찮다. 누구는 시나 소설을, 누구는 찰나의 단상과 송곳처럼 벼린 우화를 보내왔다. 이해하려 들면 점점 미로에 빠진다. 갸우뚱, 애매하고 애매하다. 근데 곱씹다 보면 뭔가 우러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느새 온몸의 털이 솟구치는. 그 속엔 책과 인생 위에 펼쳐진, 세상과 우주가 있다.

박 씨가 들려주는 수전 손택 편에 대한 감상을 들어보자. “그의 말대로라면 글을 쓴다는 건 날아다니는 일이다. 그것도 발밑에 책을 타고 우아하게 하늘로 떠오르는. 길 위의 인생에도 책은 빠질 수 없다. 비가 내리면 펼쳐진 책 사이로 들어간다. 별이 총총한 하늘도 바라본다. 날이 어둡다 걱정할 필요도 없다. 활자들은 언제나 푸른빛으로 빛날 테니. 계속해서 책이 주는 자유를 누려 보라. 물론 들판의 표범이 책을 물고 가지 못하게 잘 지켜볼 것.”

그들에 따르면 책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책 속에서 열리고, 책 속에서 갇힌다. 각성과 혼돈의 공존. 그렇기에 책은 고맙고도 무섭다. 빌딩만큼 쌓아올려진 책 위에 홀로 선 남자 그림을 받은 체코 출신 작가 이반 클리마도 그 양면성을 훑는다.

“이는 책이라든지 다른 모든 사물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숫자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말이다. 그건 거리의 자동차든, 신발장의 신발이든 아니면 하늘의 별이든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우리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친구에서 우리를 자기들 사이에 파묻어 버리는 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답은 책에 있지 않다. 책장을 넘긴 당신에게 경배를.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