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 60년을 기리기 위한 행사 준비가 국가 차원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건국 6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출범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국호에 대하여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대한민국의 국호가 대한제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학문적 설명이 없어도 그 유사성만으로도 충분하다. ‘제(帝)’자를 ‘민(民)’자로 바꾸어 군주 주권의 제국에서 국민 주권의 민국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간단한 작업이지만 민주주의의 함의까지 담아 놓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든 나라이름이다. 광복 후 온갖 어려움 끝에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의 국호를 계승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고 대한제국을 건설한 고종황제, 즉 광무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우리 역사상 최초로 황제를 칭하고 제국을 선포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시절 식민사관으로 점철된 역사 이해에서 대한제국은 터무니없이 평가절하되었고 고종황제는 나라를 잃은 무능한 지도자로만 단죄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여러 자료가 발굴되면서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평가절하된 구한말 역사실상
국내 자료로는 의궤(儀軌)자료, 예를 들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 등을 통하여 대한제국의 실상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외 자료로는 고종황제가 세계열강과 연결하여 문제 해결을 도모한 자료, 예를 들면 1905년의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독일 황제에게 보낸 친서의 발굴을 들 수 있다.
1873년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시의성을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개화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여기에는 명성황후도 중요한 한몫을 하였다. 이후 개화정권은 개항을 단행하고 근대문물의 수용을 위하여 1880년대 개화정책을 폈다. 이른바 개화파가 추진했다고 알려진 초기개화운동의 배후에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있었다.
당시 개화파들은 대부분 20대였고 김옥균만이 30대였다. 아무리 격변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연소하였고 예민한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도 않았으니 고종이나 명성황후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초기개화운동은 일본공사가 막후에서 작용한 1884년의 갑신정변으로 좌절되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경과하고 1894년 단행된 갑오경장은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되었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일본이 그해에 청일전쟁에 승리한 기세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은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즈음 유생들의 글에는 “새로운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는 인식이 보인다. 중국 고대 혼란했던 시대처럼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세계 여러 나라가 끊임없이 싸우고 제자백가와 같은 온갖 이념의 각축장이 될 것이라는 예견이었다.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
일본은 조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우선 청나라와 조선을 떼어 놓아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부추겼다. 그리고 열강의 침탈과 일본의 책동에 맞서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의 외교력을 발휘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심층연구로 난국 타개할 지혜를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의 국력을 마지막으로 응집하여 탄생시킨 것이 대한제국이다. 국격을 높여 난국을 헤쳐 나가자는 것이었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문(文)을 우선하는 우문정치를 지향하던 나라가 이제 바야흐로 무(武)의 가치를 인정하고 무를 빛내겠다는 연호를 채택한 것이다.
대한제국에 대한 재조명은 시작단계이다. 앞으로의 연구는 제국을 칭하게 된 사상적인 배경 연구로 조선 후기 명나라 계승의식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한제국이 내세운 구본신참(舊本新參·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의 이념을 공감하던 대한제국의 지지기반에 대한 연구도 심층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정옥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