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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통계로 세상읽기]밀밭이 왜 사라졌을까?

입력 | 2008-04-28 02:59:00


명맥만 남은 밀농사… 수입산에 밀려 자급률 0.4%

우리의 들판, 논마저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박목월의 시 ‘나그네’(1946)를 보면‘강나루 건너서/밀밭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에 나오는 밀밭을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들판에서 밀밭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왜 밀밭이 사라졌을까? 밀에 대한 수요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다. 한국의 밀 수요는 엄청나다. 국민 1인당 연간 밀 소비량이 1970년 26.1kg에서 2006년 32.4kg으로 6.3kg(24.1%)이나 증가했다.》

밀 소비가 증가하고 있으니 밀농사를 지으면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국내 농민들은 밀농사에 관심이 없다. 국산 밀은 비싸고 수입 밀은 싸서 소비자들이 국산 밀가루를 사주지 않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 기준으로 수입 밀가루는 1kg에 1190원인 데 비해 국산 밀가루는 2600원으로 2.2배나 비싸다.

국내에 외국 밀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다. 미국의 농산물수출원조법에 의해 많은 양의 미국 밀이 무상으로 국내에 제공됐다. 전쟁 후의 폐허 상태에서 이뤄진 미국의 밀 무상 원조는 우리 국민에게 생명 줄과 같았다. 당시로서는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상 원조된 밀이 싼 값으로 시장에 나오면서 국내 밀 가격이 하락했다.

무상 원조가 끝난 1960년대에는 미국 밀 수입이 허용돼 값싼 미국 밀이 국내에 대량으로 들어오게 됐다. 우리 밀 가격은 계속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밀 가격 하락으로 수지가 맞지 않아 국내 농민들은 밀농사를 포기하게 됐다. 들판에서도 밀밭이 점차 사라지게 됐다. 한국의 밀 소비량 가운데 99.6%가 수입 밀(2007년 기준)이며 우리 밀은 겨우 0.4%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밀밭이 사라져가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밀밭이 사라진 것처럼 논도 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밀밭이 사라진 사례를 통해 이를 추론할 수 있다. 만일 값싼 외국쌀이 대량으로 수입돼 쌀값이 크게 하락한다면 수지가 맞지 않아 농민들은 쌀농사를 짓지 않을 것이고, 논도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은 1995년부터 외국 쌀을 수입하고 있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국내 쌀 시장 개방을 10년간 유예하는 대신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동안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2005년부터 쌀 시장을 완전 개방하기로 하였으나, 2004년부터 미국 중국 등 쌀 수출국과 협상해 추가로 10년간(2005∼2014) 쌀 시장을 완전 개방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또 국내 쌀 소비량의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게 됐다. 2005년 22만5575t을 시작으로 쌀 수입량은 점차 늘어나서 2014년에는 40만8700t을 수입해야 한다.

이 같은 의무 수입물량은 국내 쌀값을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2015년부터는 쌀 시장이 완전 개방돼 수입 물량에 제한이 없어지므로 수입 물량이 많아져서 가격 하락폭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의 핵심은 향후 쌀 가격 하락폭이 얼마나 클 것이냐 하는 점이다. 가격 하락폭이 커서 쌀 가격이 생산비에도 못 미칠 만큼 하락한다면 농민들은 쌀농사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고, 그에 따라 논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막연한 우려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국내 쌀 가격은 하락 추세인데 쌀 생산비는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높은 쌀 생산비가 유지되고 쌀값의 하락 추세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논이 조금씩 사라질 것이다. 논은 이미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국내의 벼 재배면적은 1987년 126.2만 ha로 최대를 기록한 이후 감소하기 시작하여 2005년에는 98만 ha로서 100만 ha 이하로 떨어졌다. 그만큼 논이 사라진 것이다.

국내 쌀 농업이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쌀 생산비를 낮추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쌀 시장 완전개방을 유예 받은 10년 동안 생산구조를 철저히 개혁해 생산비를 낮추고 품질을 향상시켜 우리 쌀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내 쌀 농업을 지킬 기회는 더는 없을 것이다. 들판에서 논이 사라지는 비극도 현실화될지 모른다.

안병근 공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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