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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컷 속에 ‘일상’이 들어왔다

입력 | 2008-03-26 02:50:00


최근 만화계 일상성 내세워 폭력위주 장르만화 탈피

취업난 첫경험 동거 등 실생활 소재로 공감대 커져

“이제 더는 내 자신을 못 믿겠어. 내가 욕했던 사람들처럼, 내가 싫어했던 사람들처럼 내가 똑같이 하고 있으니까.”

“나도 비슷해. …항상 포기하면서 사는 엄마를 보며 난 절대 저렇게 바보같이 살지 말아야지 생각했어. 하지만 누군가 날 관찰한다면 말하겠지. 진짜 구질구질하게 사네….”

소설이 아니다. 영화 대사도 아니다. 사각 그림 컷에 담긴 만화. 요즘 젊은 층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바이 바이 베스파’(박형동 지음·애니북스)의 한 장면이다.

만화답지 않은 만화. 올해 들어 만화계에 ‘일상성’ 바람이 불고 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고, 일상보다 더 일상적인.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나 일상의 흔한 소재를 다룬 만화책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20, 30대 젊은 만화가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취업난, 동거, 군대…. 비슷한 시대 비슷한 경험을 담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기존 장르 만화와는 결이 다른, ‘일상 만화’라는 새로운 흐름인 셈이다.

‘노란구미의 돈까스 취업’(거북이북스)을 그린 정구미(29) 작가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성인이 된 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취업 문제로 고민하던 자신과 주위 친구들의 모습을 담은 만화가 ‘노란구미의…’이다. 일본에서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돈가스를 먹는 관습에서 제목을 떠올렸다.

“주위 친구, 그리고 동년배들과 소통하고 싶어 많은 부분 실제 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현실보다 과장하지 않고, 취업 준비생들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소설가 박민규 씨가 “아마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야기”라고 극찬했던 ‘바이 바이 베스파’도 일상 만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5개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10, 20대의 동거, 첫 경험, 유년의 추억 등을 소재로 했다. 시간이 흐르며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고 어른이 되어 가는 청춘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군대 체험 등을 소재로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석 씨의 ‘마음의 소리’(중앙북스), 그림에 대한 미대생의 고민과 첫사랑을 버무린 연우 씨의 순정 만화 ‘핑크레이디’(중앙북스) 등도 최근 주목받는 일상 만화들이다.

일상 만화는 만화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만화 전문 출판사 ‘세미콜론’의 강병한 편집팀장은 “기존 만화 관습에 물들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 소설이나 영화에 많이 이용됐던 ‘현실적 공감대’ 요소를 만화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상성은 해외 인디만화가들도 선호하는 소재다. 최근 국내 출간된 ‘무슈 장’(세미콜론)이나 ‘재미난 집’(글논그림밭)도 일상 만화에 해당한다.

프랑스 작가 필리프 뒤피와 샤를 베르베리앙이 그린 ‘무슈 장’은 “남성판 섹스 앤드 더 시티”란 별칭이 붙은 만화. 생활고에 시달리며 연애도 번번이 실패하는 30대 독신 남성이 주인공이다. 별다른 과장도 없이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앨리슨 벡델의 ‘재미난 집’은 등장인물의 표정마저 시종 ‘무표정’하다.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여성 동성애 작가의 가족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대형 자본과 결별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해외 일상 만화 작가와 달리 국내 일상 만화 작가들은 자본을 갖춘 출판사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는 그 이유를 국내 만화 시장의 몰락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긴 서사의 작품을 게재할 수 있는 만화잡지 등이 없기 때문에 인터넷에 적합한 단편 위주의 일상 만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그래도 일본의 장르 만화 틀에서 벗어난 시도에 독자들이 반응을 보인다는 점은 고무적이다”라며 “만화작가들의 다양한 도전이 계속되는 만큼 장르 만화와 일상 만화가 공존할 시장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