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김용택 지음/239쪽·1만1000원·푸르메
섬진강에는 키 작은 시인이 산다. 초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한 시인에게 전화를 걸면 수화기 너머에서 아이들이 하도 재잘대는 통에 시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시인이 조용히 하라고 꽥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근엄한 선생님이 아니라 꼭 애들 같아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시인은 그렇게 자신이 보듬는 ‘사람’과 닮았다.
김용택(60) 시인은 이제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다. 첫 시집 ‘섬진강’ 이래 그가 쓴 많은 섬진강 시와 글은 그를 섬진강 주인으로 만들었다. 이 스타 시인은 수년 전부터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쓰는 동시를 소개해 맑은 마음을 세상에 알리는 데 힘써 왔다. 그 아이들이 그의 문학과 인생을 이뤄 낸 거름이 되어서다.
‘사람’은 그 아이들처럼 자신을 키운 많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시인은 살아온 나날들을 회고하되, 그 자신은 기꺼이 조연을 맡으면서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젊었을 적 김 시인이 미혼이라는 걸 알고는 그 자리에서 김남주 시인의 여동생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당장 해남으로 내려가자던 소설가 황석영 씨, 서울이 답답하고 시가 안 써진다며 김 시인을 찾아 섬진강으로 내려와선 됫병으로 소주를 마시던 이시영 시인, 시인 선생님을 따라 스타가 된, 가난하지만 착하고 맑은 마암분교 아이들…. 잘 알려진 사람들과의 내밀한 사연에 웃음이 새어나오는 한편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렇지만, 더욱 가슴을 울리는 것은 ‘내 친구 사채, 사촌동생 용식이, 태환이 형’ 같은, 그의 글을 통해서야 알게 된 농촌 사람들이다. 특히 책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한 문장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들 중에 나만 순창으로 중학교를 가고 김복두, 양현철, 문윤환, 용조 형은 집에 남아 일을 배워 갔다.’
이 한 줄에는 수많은 사연이 들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시골에서 지독하게 장난을 치면서 자랐을 다섯 소년, 아이들을 중학교에 보낸다는 건 꿈도 못 꿨을 가난한 농촌 환경, 풀베기, 나무하기, 논일, 밭일, 고기잡이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익히던 농사일….
사채의 이름은 승권이었지만 집안의 넷째인지라 ‘사채’라고 불렸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만고풍상을 있는 대로 다 겪고 살았던 사채는, 정말 어렵게 결혼을 했다. 맞선 보는 처자에게 중신아비를 통해 “목장을 갖고 있고 몇 달만 있으면 양장점을 차려 주겠다”고 말을 넣었다. 홀랑 넘어간 여자가 결혼했지만 실은 목장이란 작은 염소우리였고, 사채의 집은 하도 첩첩산중에 있어서 양장점을 낸다 해도 찾아올 손님이 없었다. 아내가 본디 사람이 순해서인지 막막한 마음을 접고 오순도순 남편과 살았다. 남편 친구(김 시인) 앞에서 옛날 얘기 들려주다 살짝 코가 빨개지고 말 만큼 아내는 선했다.
사촌 용조 형은 타고난 농사꾼이었다. 낫을 손에 쥐고 무엇을 만들면 눈이 부셨다. 수많은 나무꾼의 나뭇짐 속에서도 형의 나뭇짐은 얼른 눈에 띄었다. 아마도 형의 꿈은 자기 땅을 갖고 농사를 짓는 일이었겠지만,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전에 다른 사람들처럼 서울로 이사 가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리 키워서 돈 벌겠다고 나섰지만 쫄딱 망하고는 앞이 캄캄했다는 시인. 실의에 빠져 무위도식하는 친구 용택이를 보고 어느 날 동창 철호가 권했다.
“용택아, 너도 선생 시험 볼래?”
광주교대에서 교사를 뽑는다는 것이었다. “안 보겠다”고 하자 철호는 “일단 사진만 찍으라”며 사진관으로 데리고 갔다. 어찌어찌 시험을 보게 됐고 선생님이 되었다. 평생의 직업으로 이끈 그 친구가, 화가의 꿈을 접고 변변찮게 사는 것이 속상하다는 시인. 그래도 “인생은 암도 모른당게”라며 철호의 인생 역전을 소망한다.
학교 공부를 하지 않아 글자도 모르시지만 “용택아,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고 타이르실 때 세상 누구보다 단단한 중심을 품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는 시인의 어머니부터, 그때껏 살아온 어떤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 튼튼한 어떤 것들을 새로 터득하고 몸에 익히면서 촌사람이 되어 간 아내에 이르기까지 ‘시인 김용택’은 글과 삶을 빚진 많은 사람에 대해서 담백하게, 순하게,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단순하고도 소중한 진실을 알려준다. 당신의, 나의, 인생은 지금까지 만나고 부대낀 많은 사람에게 빚졌다는 것.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