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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우전]1948년 南北협상에 대한 역사인식

입력 | 2007-10-12 03:03:00


3일자 ‘동아광장’에 실린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민족은 主義를 초월하는가?’ 주제의 글을 보았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평양까지 백범을 수행하며 1948년 남북 협상의 전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남북 협상에 대한 사실을 밝히고자 졸필을 든다.

윤 교수는 “1948년 4월 19일 백범은 남북조선 제(諸)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결연히 평양으로 향했으나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실패가 예상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대표자 연석회의와 그 후 있었던 ‘4김 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모두 북한에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의 정통성을 제고하기 위해 소련 당국이 백범의 이름과 진정성을 악용한 것이다…백범이 왜 소련의 속임수에 말려들었을까? 이유는 지금 민족 앞에 놓인 문제가 너무나 크다는 상황 인식과 민족이 주의를 초월한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이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 4월 19∼23일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가 있었고 이후 4김 회의와 지도자협의회가 열렸으며 그 결과 4월 30일 남북 지도자 공동성명이 만들어졌는데, 4김 회의부터는 모두 백범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당초엔 연석회의만 예정돼 있었으나 백범이 김두봉에게 후속 과정을 제의하고, 김두봉이 김일성에게 뜻을 전해 진행된 것이다.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제5차 개헌으로 좌우 연립내각을 구성했는데 이는 임정 지도자들이 ‘민족이 주의를 초월한다’는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임정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공포한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도 “남북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남북통일선거로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공표했다. 백범이 당수였던 한국독립당 역시 1947년 10월 민족 대의에 입각한 자주통일정부 수립론을 제창했다.

1948년 2월 10일 전 동포에게 눈물로 통일조국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했고 엿새 후인 2월 16일 북측에 남북 협상을 제의했으니 북이 제의한 3월 25일보다 39일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백범은 그해 1월 2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제시한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의견서에서도 “남북한인 지도자회의 소집을 요구하면서 한국 문제는 한인이 결정할 것이고 미소 양군이 철퇴하고 평화로운 국면 위에서 조국의 완전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주장했다.

이처럼 백범은 남북 협상의 전 과정을 주도했다. 소련에 이용당한 것도 없고 속은 것도 없다. 실패한 것도 없음은 서문과 본문 4개항으로 구성된 공동성명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성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표자 연석회의를 뒤이어…지도자들의 협의가 진행되었다…이 협의회에서는 상정된 제 문제를 충분히 토의한 결과 지도자 사이에 다음과 같은 협의가 성립되었다. 1. (自主) 외국군 철퇴, 외세 배격. 자주 자결 능력이 있다. 2. (平和) 외국군 철거 후 내전 불발 확인, 질서 확립을 참여한 정당, 사회단체가 담보한다. 3. (民主) 아래 제 정당의 공동명의로 전 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첫 과업으로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4. 단독선거 반대, 그 결과를 불승인 불인정 불지지-남측 13개 정당 15개 단체 거족적 대다수, 북측 3개 정당 12개 단체 거족적 전체.”

이처럼 1948년 남북 협상은 거족적인 성원과 문화인 108인의 지지를 받으며 임시정부의 대다수 국무위원과 국내 대다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가 참가해 조국통일의 초석이 되는 4·30 공동성명을 만든 것이다. 백범은 조국통일의 활로를 찾기 위해 미소 군정하에서 험난한 38선 가시밭길을 넘으면서 제2의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그 공동성명서를 끝까지 지키다 순국한 것이다.

김우전 전 광복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