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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역사의 상처를 핥아 세상은 풍요를 잉태한다

입력 | 2007-09-22 02:42:00


◇혁명/르 클레지오 지음·조수연 옮김/536쪽·1만8000원·열음사

‘장으로서는 로질리 시절을 단 1시간만이라도 다시 살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그의 앞에는 살아 숨 쉬는 구멍과도 같은 미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자아를 찾을 수도, 성공할 수도, 한 사람의 남자도 될 수 없을 듯한 이 막막함 속에서, 그 희망이 그에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것은 소설 ‘혁명’의 주인공인 장 마로가 기억을 내림받아서다. 그는 고모할머니 카트린에게서 모리셔스 섬 로질리의 기억을 물려받고 있다. 모리셔스 섬은 마로 가문이 자리했던 곳이다. 작가 르 클레지오(67)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혀온 르 클레지오. 남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속한 곳은 조상들이 살아온 모리셔스 섬(프랑스령이었다가 독립)이라고 말하는 그다. ‘몸은 프랑스에, 그러나 정신은 모리셔스 섬에 둔’ 이 괴리감은 르 클레지오의 창작의 원천이기도 하다.

‘혁명’은 르 클레지오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프랑스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장은 직접적으로 르 클레지오의 아버지가 모델이 됐지만, 뿌리와 정체성에 관해 오래도록 탐색해 온 르 클레지오의 초상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소설을 통해 르 클레지오는 ‘나는 왜 문학을 하게 되었나’에 대해 고백한다.

장 마로는 매일 방과 후 카트린 고모할머니를 찾아간다. 할머니는 그에게 마로 가문 5대의 역사와 모리셔스 섬의 추억을 들려준다. 새들의 노래, 끝이 없는 정원, 시냇물이 흐르는 협곡, 이슬에 젖은 나뭇잎, 밤이면 베일을 흔드는 바람, 두꺼비의 노래….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할머니는 현재로부터 자유롭고, 늘 과거의 기억에 젖어 있을 수 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빼어나게 아름답게 세공된 문장으로 전달된다.

“신은 모리셔스를 창조했다. 그 후에 천국을 만들었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할머니가 그려 보이는 모리셔스는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답다.

낙원 같은 모리셔스 섬과 교차되는 이야기는 조상인 장 외드 마로의 일기다. 그는 프랑스대혁명에 취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하지만 약탈과 기근 등 혁명에 따르는 잔혹함에 실망해 전역한 뒤 새로운 터전을 꿈꾸며 모리셔스 섬으로 향한다. 모리셔스 섬에 대한 꿈같고 나른한 묘사와 장 외드 마로가 겪는 혁명과 전쟁의 끔찍함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마로의 일기는 그 자체로 프랑스의 굴곡진 역사다.

이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는 한 사람이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그가 갖고 있는 기억이, 그 기억의 상처가, 기억에 얽힌 역사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 세상에 흘려보낸다. 그 상처의 기록으로 인해 세계는 풍요로워진다. 이것이 ‘혁명’이다. 원제 ‘R´evolutions’(2003년).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