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은 노사 4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 1층에서 윤여철 사장(오른쪽)과 이상욱 노조 지부장이 임금 단체협상 잠정 합의안을 마련한 뒤 악수하고 있다. 울산=최재호기자
4일 현대자동차 노조가 파업 없이 임금, 단체협상을 사실상 타결한 데에는 ‘무분규 타결’을 요구하는 여론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올해 들어 이미 2차례 파업을 벌인 현대차 노조는 지역 주민 등의 압박 속에서 파업을 강행하는 데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세계 시장의 치열한 경쟁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차 측은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파업을 피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한국의 대표적 강성 노조인 현대차 노조의 임단협 무분규 타결은 한국 노동계의 노사관계 판도에도 영향이 작지 않을 것으로 노사 문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달라진 교섭 태도
이번 타결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10년 만의 무분규 타결일 뿐 아니라 달라진 양측의 교섭 태도 때문이다. 현대차 노사는 1995∼1997년에 임단협을 무분규로 타결했다.
12번의 교섭만으로 임단협이 타결된 것은 1987년 현대차 노조 결성 이후 처음이다.
현대차 노조는 “회사 측의 제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난달 24일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하지만 결렬 선언 이후에도 노조는 사측과 대화를 계속했다. 파업을 앞두고 상대방을 비난하며 대화를 거부했던 과거 조정기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회사 측도 “밀고 당기기 협상을 벌이지 말자”며 협상 초부터 노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제안을 내놓았다. 회사 측은 노조에 기본급 5.4% 인상에 성과급 300% 및 일시금 100만 원 지급을 협상 초기에 제시할 정도로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노조 관계자는 “이런 카드는 협상 막판에 내놓는 게 보통이었으나 올해에는 사측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와 솔직히 놀랐다”고 말했다.
또 과거 노사협상 자리에서 ‘베테랑’ 노조 대표들은 일부러 대화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면서 ‘길들이기’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노조 측은 조합원들의 의견과 여론을 의식해 예년에 비해 ‘예의’를 갖춰 협상에 응했다는 게 노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시장상황 악화… “회사가 살아야”
노조의 이런 변화에는 “실익을 챙기자”는 조합원들의 목소리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임금협상에서 노조는 임금 기본급의 300%에 해당하는 1인당 200만 원의 성과급을 받아냈지만 21일간 파업에 따른 임금 손실액이 1인당 평균 200만 원 정도였다.
올해 1월 성과급 파업에서도 1인당 100만 원씩 임금을 손해 봤다. 노조원들은 생산 손실분을 채워 미지급 성과급 50%(100만 원)를 받아내기 위해 30여 일간 야근과 특근을 해야 했다. 반면 사측은 생산 손실을 감수하는 동시에 노조와 약속한 성과급을 지급해야 해 이중의 부담을 져야 했다.
지난달 24일 노사가 협상 결렬을 선언하자 노조원들이 노조 내 노동단체 홈페이지 등에 잇달아 파업 자제를 촉구하는 글을 띄운 것도 이런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쟁의 돌입 찬반투표에서 파업에 찬성한 노조원은 재적인원 4만4867명 중 2만8243명으로 찬성률은 62.9%에 그쳤다. 지난해 72.8%보다 10%포인트가량 낮았으며 2001∼2006년 평균 68.5%보다도 크게 낮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낮은 원-달러 환율, 원자재 가격 인상, 불확실한 시장 전망 등으로 경영 환경마저 지속적으로 악화되자 조합원들 사이에서 “회사가 살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현대차 역시 막대한 생산손실을 줄일 수 있게 됐다.
현대차는 지난해 20여 일간의 파업으로 1조2958억 원(9만3882대), 2005년 11일 파업으로 5795억 원(4만1889대)의 손실을 봤다.
○노동계의 달라진 분위기도 한몫
이랜드그룹 유통계열사 등 일부 기업의 노사 갈등이 계속되고 있지만 전체 노동계에 확산되고 있는 노사 화합의 분위기도 현대차 노조를 압박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부에 따르면 7월 말까지 임금교섭이 타결된 100인 이상 사업장 1970개의 임금 인상률은 평균 4.7%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5.3%보다 0.6%포인트 낮았다.
또 올해 초부터 지난달 27일까지 전국 분규 발생 건수는 7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94건보다 21.3% 줄었다. 근로 손실일수도 지난해 같은 기간의 90만8357일보다 62.8% 감소한 33만986일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울산 시민을 포함한 여론의 압박은 현대차 노조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지난달 말 교섭이 결렬된 뒤 울산의 시민단체들은 “무분규로 타결을 하면 음식 값을 깎아 주겠다” “현대차만 사겠다”며 파업 자제를 촉구했다.
○다른 기업에 파급효과 클 듯
현대차의 무분규 타결은 다른 기업의 노사교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 우문숙 대변인은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요구사항 관철이지 강경이냐, 온건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며 “현대차 사례처럼 회사 측이 전향적으로 나온다면 노조도 성의 있게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전국경제인연합회 황인학 경제본부장은 “현대차 노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대화로 해결 방안을 찾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며 “이번 타결을 계기로 현대차뿐 아니라 다른 사업장도 상생의 노사관계로 탈바꿈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회사 측이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정이 나쁜 다른 기업의 임단협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다.
단국대 김태기(경제학) 교수는 “회사가 먼저 나서 노조의 요구를 지나치게 많이 들어준 측면이 있다”며 “노조는 이런 점을 인정해 앞으로 안정적인 노사관계와 생산성 향상으로 보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파업을 벌일 경우 생길 수 있는 생산손실, 무분규 타결에 따른 브랜드 이미지와 대외 신뢰도의 제고까지 고려하면 회사로서도 이득”이라고 말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