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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정옥자]‘민주화운동’은 계급장이 아니다

입력 | 2007-08-02 02:58:00


드디어 정년이 눈앞에 다가왔다. 교수생활의 희로애락이 어제 일같이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한다. 공교롭게도 1981년 신군부의 출발과 함께 교수생활을 시작했기에 시국 문제로 괴로울 운명이 마련돼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학문의 문리를 트기 위한 진통이나 학생을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치느냐 하는 원론적인 고민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더 큰 고통을 겪었다.

최루탄 매연으로 자욱한 교정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대학은 민주화운동으로 열병을 앓았다. 공부에만 전념하려는 학생은 출세주의자 내지는 기회주의자로 매도당하고 운동권 학생은 장래 정치로 성공하기 위해 민주화의 대의를 빙자한 지름길을 선택한 자로 의심받았다. 그 틈새에서 교수들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어느 한쪽으로 확실하게 태도를 정한 것이 아니어서 괴로웠고 그래서 방황했다.

4·19세대로서 여고 3학년 때 학생운동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경험이 있는 나는 그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역할을 자임했다.

80년대 캠퍼스 치열했던 나날

80학번인 어느 학생은 그날 내게 강의가 없다는 사실까지 확인하고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돌아갔다. 점심때가 되어 ‘점심이나 먹자’며 식당에 갔다가 이제 돌아가겠거니 했는데 연구실에 따라왔다. 커피를 타 주고 그것만 마시면 가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토론하는 것으로 때웠다.

가만히 살펴보면 학년마다 특징이 달라 학생운동의 성향이 강한 학년이 있는 법이다. 학교에 깔려 있던 형사들은 그런 기미까지 파악했는지 그 학번 중 비교적 온건한 학생이 과대표를 맡았는데도 구체적인 범법행위가 없는 상태에서 사전에 연행해 학생들의 분노를 샀다.

그 학생은 투사로 변했고 구속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지도교수의 진정서가 효과가 있다고 해서 생전 처음 진정서라는 것을 써서 친분이 있던 조영래 변호사를 찾아가 봐 달라고 부탁했다. 조언을 받아 몇 군데 보강해서 재판정에 갔다.

그런 사이사이에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비분강개했고 나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부지런히 커피를 탔다. “정 선생 다방 차렸느냐?”는 동료 교수들의 핀잔을 들으면서….

1984년으로 기억되는데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이 인문대와 사회대가 연결된 5, 6, 7동의 ㄷ자형 건물을 봉쇄하고 교수연구실까지 뒤져 수업 받던 학생까지 잡아 굴비 엮듯이 연행했다.

풀려난 학생들은 강의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국립 호텔에서 국비로 MT 잘하고 왔다”고 했다. 멀쩡하게 공부에 전념하던 학생까지 의식화시켜 민주투사로 만들어 버렸던 시대였다.

요즘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일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1986년 4월 서울대 교수들은 신군부의 정권 연장 저의를 간파하고 민주화 서명운동을 일으켰다. 참새도 죽을 땐 ‘짹’ 하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교권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상황에서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절박함과 참담한 굴욕감 때문이었다.

운동 전력 팔더니… 허망한 뒤끝

서명 교수는 불과 50명을 넘지 못했지만 다음 해 6월 항쟁 때는 100명이 넘었고 민주화운동의 불씨 하나는 지폈다고 생각한다. 지독한 자괴감에서 벗어나고 학생에 대한 교수의 최소한의 체면 차리기였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도 그때 서명 교수들은 지금까지 조용히 연구실을 지키면서 교수의 본분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열정을 바치던 학생도 대부분 건전한 생활인으로 살아간다.

손톱만 한 민주화운동의 전력이라도 팔아 공을 보상받겠다고 나서는 이 부박한 세상에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거나 건전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어 위안이 된다. 민주화운동의 뒤끝이 이렇게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은 누구의 탓일까?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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