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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은 ‘파워걸’]학교 ‘실세’로 떠올라

입력 | 2007-04-18 03:14:00


토요일인 7일 오후 3시 서울 구로구의 한 카페. 전국 고교 학생회 간부들의 모임인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한고학련) 집행부 회의에서는 톤이 높은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오고갔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에 참석한 집행부원 14명 가운데 9명이 여학생이었다.

이날 안건은 여름방학 때 열릴 학생회 캠프에 관한 것. 전국의 학생회 간부 200여 명을 초청하는 행사다. 부의장인 한혜미(18·인천예고 3) 양이 캠프에서 진행될 프로그램을 설명했다. 곧이어 행사 일수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주요 일정이 축제와 학생회 노하우에 대한 강의인데 2박 3일은 너무 길어요. 1박 2일로 조정하죠.”

“다른 학교 학생회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려면 2박 3일은 돼야 할 것 같은데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토론에서 남학생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의장인 최성호(18·서울 중대부고 3) 군은 “장단점을 홈페이지에 올려 전체 대의원의 의견을 묻자”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이에 여학생 대의원들이 동의해 논쟁은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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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간가량 진행된 회의를 지켜본 기자가 최 군에게 “왜 남학생들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최 군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요즘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더 적극적인데 학생회 간부 여학생들은 더 적극적이어서 남학생들이 기가 죽은 것 같다”고 말했다.

리더 여학생의 약진이 두드러지면서 거의 모든 남녀공학 학교에서 이런 풍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회의를 주도하는 것도, 마지막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도 여학생들의 몫이 된 것.

○ 커진 여학생들의 목소리

지금의 중고교는 여학생이 전체 리더 계층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상태인 ‘여성 리더의 일반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서울 독산고 심충보 교사는 “이번 학기 말에 있을 전교 학생회장 선거의 출마 희망자를 확인해 보니 4명 가운데 3명이 여학생이었다”며 “이런 추세대로 가면 학급회장뿐만 아니라 수년 내 전교 학생회장이 여학생인 학교도 절반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러다 보니 ‘파워걸’은 과거 여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교단에 선 지 9년째인 서울 고려대부속중 손명권 교사는 몇 해 사이 체육대회 준비 풍경이 부쩍 달라진 것을 느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학생이 학급회장이면 체육대회를 앞두고 남학생들이 여학생 회장을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출전 선수 명단을 짜고 연습을 했다.

요즘은 다르다. 손 교사는 “여학생 전교 학생회장이 여자 씨름, 여자 축구와 같은 종목을 도입하자고 제안하는가 하면 남학생들끼리 서로 출전하겠다고 싸우면 여학생 학급회장이 나서서 조정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 학교 규정은 여학생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서울 중대부고의 김영란 교사는 “이달 초 전교 학생회장 후보에 출마했던 여학생 후보가 ‘여학생도 운동화를 신게 해 달라’는 공약을 내걸어 많은 여학생에게서 호응을 얻어 당선됐다”며 “이 같은 공약은 남학생들만 회장 선거에 출마하던 몇 해 전만 해도 볼 수 없던 것”이라고 말했다.



○ 여성 리더에 대한 부정적 인상도 지워

지금까지 성공한 여성은 ‘자기 것만 챙기는 독종’이라는 인상이 있었던 게 사실. 남성은 물론 여성들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학교 내 여성 리더들은 기존의 여성 리더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도 바꾸고 있다.

경기 안양시 성문고에서 학급회장을 맡고 있는 2학년 이겨레(17) 양은 급우들 간 학기 초 서먹서먹함을 없애자며 ‘마니또(수호천사) 게임’을 제안했다.

마니또는 ‘비밀친구’라는 뜻의 이탈리아 말로 제비뽑기 등을 해서 지정된 친구의 수호천사가 돼 친구 모르게 잘해 주는 게임이다.

반 친구들과 빨리 가까워지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1학년 때 알고 지내던 친구들끼리만 주로 얘기하는데 그쳤던 학생들은 이 양의 제안을 반겼다.

이 학급의 최진혁(17) 군은 “남학생 회장은 학급 내 집단 간 알력이 있어도 모를 때가 많고 알아도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인 데 비해 여학생 회장은 하나로 모아서 잘해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리더 여학생들이 “이것 해”보다 “이것 하자”의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도 ‘여성 리더=품 넓은 리더’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다.

한국삼육고 장종환(학생부장) 교사는 “리더 여학생들은 직접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면서 ‘장난 그만하고 빨리 청소하자’고 설득해 상대방이 반발하기 어렵다”며 “축제 등 학교 일을 할 때도 가능한 한 많은 학생에게 참여 기회를 주는 게 이들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입시 부담이 큰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갈수록 리더 여학생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여성 리더에 대한 인식 변화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창동고 곽동찬 교사는 “입시란 큰 산이 있어 한국의 청소년들은 중고교 시절 자치활동을 하기 쉽지 않은데 요즘 여학생들의 자치활동 의지는 대단하다”며 “여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학생회나 동아리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서 존경을 받는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