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모두 19개 분야 협상을 벌였다. 막판까지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 농업 등 이른바 '4대 쟁점'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머지 분야도 합의가 쉽지는 않았다.
특히 개성공단 생산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해 무관세 혜택을 줄 것인가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4대 쟁점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의 협상 타결내용을 알아본다.
●개성공단 생산품, 한국산 인정 기틀 마련
양국은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하는 문제는 예상대로 협정 발효 후 추후 협의하는 '빌트인(built-in)' 조항으로 넣기로 했다.
이에 따라 양국은 '한반도 역외(域外) 가공지역위원회'를 설치해 앞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개성공단을 포함한 남북 경협지역에서 생산되는 상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하고 미국에 수출도 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이는 앞으로 개성공단뿐만 아니라 북한 내 다른 지역에서 한국 기업이 생산한 제품도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통관 분야에서는 까다로운 원산지 증명서 요구가 간소화됐다. 기존에는 원산지 증명서를 관세청 등 관계기관을 통해서만 발급받을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수출·생산·수입자가 자율적으로 작성해서 발급할 수 있게 됐다.
또 수입화물이 공항이나 항만에 도착한 이후 48시간 이내에 반출하도록 했고 화물 도착 전 수입신고서류를 제출하는 '수입 전 사전신고제도'도 도입했다. 그동안 우리 화물이 미국의 공항·항만에 머무는 시간은 최장 5일이었으나 이번 조치로 인해 미국 현지 통관절차가 한결 신속해질 전망이다.
특히 시간 단축이 생명인 특급 화물은 통관서류를 최소화하고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 원칙적으로 서류 제출 후 4시간 이내 반출을 허용키로 했다.
●반덤핑 관세 등 비관세 장벽 낮추기로
양국 간 무역구제협력위원회를 설치하고 양국이 반(反)덤핑관세 등 비관세 장벽을 실질적으로 낮추기로 한 것이 합의 내용의 가장 큰 골자다.
무역구제는 외국 상품의 수입이 급증해 국내 산업이 피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는 때 외국 제품의 수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한다.
무역구제협력위원회는 양국의 고위 간부급이 참석해 연 1회 회의를 갖는다. 양국은 또 반덤핑 조사를 시작하기 전 사전 통지 및 협의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반덤핑 제소를 당한 기업을 현장 실사할 때 자료가 미진하다고 요구해 불이익을 주는 제도도 금지하기로 했다.
이밖에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다자(多者)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조치)에서 한국과 미국은 상호간에 재량권을 발휘해 대상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최근 25년간 한국 기업이 미국에 반덤핑 관세로 지불한 돈만 373억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6.8%에 이른다.
한편 전자상거래 분야에서는 온라인으로 전송되는 디지털 콘텐츠의 경우 무관세 관행이 유지되며 오프라인으로 배송되는 디지털 콘텐츠도 공산품으로 간주해 관세를 없애기로 했다.
또 전자서명 및 인증 제도를 서로 인정해주기로 해 소비자 보호 장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부동산 등은 원칙적으로 '정책주권' 인정
투자 분야에서는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ISD) 도입 여부가 쟁점이었다. ISD란 투자자(기업)가 상대방 정부의 조치로 인해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상대 정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양국은 협상 초기에 이미 ISD 도입에 원칙적인 합의를 했지만 조세와 부동산 정책을 ISD 적용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한국의 주장을 미국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최종 고위급회담까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측은 보건·환경·안전과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 등 정당한 정부정책은 원칙적으로 간접수용(국유화 등 직접수용 외에 개인 사유재산 등에 영향을 미치는 각종 정부정책·조치)에 해당되지 않음을 협정문에 명시했다.
ISD가 도입되면 미국 투자자(기업)가 한국 정부의 입법조치나 행정조치에 대해 간접수용이라고 주장하면서 국내 법원이 아닌 국제투자분쟁중재센터(ICSID)에 제소할 수 있다. ICSID가 투자자의 손을 들어주면 한국 정부는 그 손실을 모두 보상해줘야 한다.
일부에서는 ISD 도입이 미국의 투기자본을 보호하는 부작용과 정부 정책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노동 분야에서는 협정 당사국이 노동협정문을 위반하면 상대국의 접촉창구에 시정요구 등을 할 수 있는 공중참여제도(PC)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단체교섭권, 적정수준의 최저임금 등 국제적으로 인정된 노동권을 준수하자는 협상취지에 따른 것.
이에 따라 노동단체 등으로부터 의견을 접수한 국가의 정부는 위반국 사업장의 근로자와 사용자 등을 대상으로 공청회를 열거나 조사를 벌일 수 있게 됐다.
●통신, 외국인 지분 제한 유지
통신 분야의 핵심 쟁점이었던 외국자본 지분 제한에서 한국은 "지분한도를 51%로 늘리거나 아니면 아예 폐지하라"는 미국의 주장에 맞서 현행 49% 유지를 지켜냈다.
대신 경영권 확보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지분 제한을 없애 국내 통신업체에 대한 외국인 간접투자의 길을 활짝 열어줬다.
외국인인 최대주주가 15% 이상 지분을 가진 법인을 통해 간접 투자할 때 공익성 심사를 받으면 49% 제한을 두지 않도록 했다. 단 KT와 SK텔레콤 등 지배적 사업자들에 대한 간접투자는 제외했다.
공익성 심사는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사항인 국가안전보장,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에 반하는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제도적 안전장치다.
한국 측은 외국인의 통신 사업자에 대한 간접투자를 유도하면서 한편으론 공익성 저해, 경영권 위협 등을 공익성 심사에서 걸러 방어한다는 계산이다.
한편 서비스 분야에서는 한미 양국의 기술사와 건축사의 상호 인증을 추진하기로 한 것 등이 성과로 평가된다.
양국은 이번 한미 FTA에서 기술사와 건축사의 상호 인증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현재 건축 분야는 외국 건축사가 국내 건축사와 공동으로 국내에서 영업할 수 있지만 국내 건축사는 미국에서 영업할 수 없어 문제점으로 지적돼왔다.
이밖에 한미 FTA의 정부조달 적용 기관을 중앙정부로 한정했으며, 자국 내 실적 요구 금지 조항도 신설해 입찰 과정에서 자국 내 실적만 인정하는 미국 조달시장의 관행을 바꿔 한국 기업의 미국시장 진출기회가 늘 것으로 보인다.
김유영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