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회도서관은 북한 정권 설립에 관여한 고려인 81명의 육필 수기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최근 제작했다. 사진은 허가이 전 북한 부수상의 딸 리라 씨가 쓴 ‘아빠는 암살당하였다’(왼쪽)와 유성철 전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의 글 ‘피바다의 비화’ 일부. 두 고려인의 젊은 시절 사진이 복사돼 있다. 자료 제공 연합뉴스
일제강점기 옛 소련 땅에서 태어났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거나, 연해주에서 ‘고려인’으로 살았다. 광복 직후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건설에 가담했지만 1950년대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에 숙청됐거나 소련으로 추방됐다. 세월이 흘렀고, 외로운 죽음만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듯 일제 강점, 광복, 분단, 동족 전쟁, 권력 암투를 온몸으로 겪은 고려인 81명이 체험적 수기를 남겼다. 일부는 직접 썼고, 일부는 남겨 놓은 글을 누이와 딸이 옮겨 적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장학봉 전 북한 정치사관학교장은 1990년대 초 전체 950쪽에 이르는 육필 원고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우리들의 력사’를 썼으나 마땅한 출판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원고는 동포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들을 통해 미 의회도서관에 기증됐다. 연합뉴스는 7일 “미 의회도서관이 이 자료를 마이크로필름에 담았고, 인터넷에 등록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건국에 참여한 고려인 가운데 장 전 교장, 허가이 전 부수상, 유성철 전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겸 부총참모장, 허가이의 장인 최표덕 전 북한군 딴크(탱크)장갑차 사령관, 김찬 전 중앙은행 총재, 이상조 전 주소대사의 글이 눈에 띈다.
주목되는 글은 북한군 3성 장군을 지낸 유성철 전 작전국장의 ‘피바다의 비화’다. 이번 수기집에 실린 그의 글은 제3자가 옮겨 적었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쓰딸린을 방문… 6·25전쟁 작전계획은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간 극비리에 작성되었는바… 소련 고문단 와씰리예브 중장, 뽀쓰트니꼬브 소장…들이 주동 역할을 하였다.”
6·25전쟁이 소련군과 북한 지도부의 공동 구상이란 점이 재확인된 것이다. 유 전 국장은 “나 자신이 이 노문(露文·러시아어)으로 된 작전계획을 번역하여 강건 참모장에게 주었다. 바로 이 계획이 실천에 옮겨졌다”고 기록했다.
박헌영을 직접 처형한 것으로 알려진 방학세 전 내무상의 삶은 그가 생존해 있던 1990년대 초에 누이 어리나(러시아 이름)가 4쪽 분량으로 정리했다.
어리나는 “김일성 심복자(측근)로서… 김일성이 수만 명의 애국 혁명자들을 처단한 것이 … 방학세 선생의 손을 통하여… 동포들은 그를 무도한 학살자라고 인정하고 있다”며 방 전 내무상의 숙청 주도를 인정했다.
허가이의 딸 허리라는 아버지가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 되자 자살한 게 아니라 암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아빠는 암살당하였다’라는 글에서 그는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그곳에 있던 운전수 연락병 간호원까지 모두 사라졌고… 시체를 조급히 감췄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수기 중에는 해묵은 논쟁이었던 ‘가짜 김일성론’도 들어 있다.
유 전 국장은 일제 말기 소련군이 만든 제88특별저격여단에서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던 시기를 기록했다. 그는 “1937년 보천보 파출소를 습격한 유격대는 진짜 김일성이 지휘했지만, 그는 파출소 습격 후 추격을 받다 조우한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썼다.
그는 광복 직후 10월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개선 행사를 묘사했다. “김일성이 연단에 올랐다.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33세의 청춘이었다. (내가 아는) 진짜 김일성은 50성상이 된 노(老)장군이시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