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땐 목욕물을 받는 시간마저 인내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렇게 바쁜 세상에 산다. 그런 우리에게 어떤 문학 작품들은 물 속에서 보내는 한동안이 색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여자는 방에 욕조를 놓았다. 남자는 밤마다 여자의 방에서 나오는 물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방 벽을 타고 오르는 물, 꿈틀거리고 출렁이는 물, 들어왔던 창문을 타고 넘어가는 물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방 전체가 욕조로 변하기도 했다. 욕조는 거대한 바다로 변하고, 바다는 다시 방으로 변했다가 욕조로 변했다가 했다.’ 지난해 출간된 이승우 씨의 중편소설 ‘욕조가 놓인 방’(작가정신)의 환상적인 한 장면. 이국 땅에서 ‘필이 통했던’ 남녀가 고국에서 재회한다. 그런데 제 나라 땅에서 두 사람은 서먹하다. 남편과 아이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여자를 남자는 감당하기 어렵다.
많은 연애 얘기가 그렇듯 남자는 헤어지고 나서야 여자의 상처를 헤아린다. 그토록 불편해하던 여자의 욕조에 남자가 기꺼이 몸을 담그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런데 이 마지막 부분이 아름답다. ‘욕조 안에서 물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당신은 물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여 욕조 안에 몸을 누였다. 욕조는 당신의 몸을 받아 안았다. 몸을 누이자 잠들어 있던 물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유리창을 통해 하늘에 걸린 둥근 달이 보였다. 달빛은 유리창을 타고 넘어와 욕조에 담긴 물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이 몸을 안아 주다니! 에로틱하기도, 포근하기도 한 묘사를 읽다 보면 그 느낌을 갖고 싶어 욕조의 수도꼭지를 돌리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욕조의 물은 대개, 태아를 감싼 양수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래서 물은 여성적이다. 지난해 나온 신영배 씨의 시집 ‘기억이동장치’(열림원)의 시 ‘욕조’는 물의 여성성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소녀도 운다 말간 몸뚱어리를 물처럼/ 서로의 몸에 끼얹어주는 풍경/ 눈물이 내 몸속에 양수처럼 차오른다.’ 이렇듯 어머니 뱃속을 떠올리게 한다는 데서 욕조는 삶을 근원부터 성찰하게 하는 철학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도서출판 작가)에 실린 정이현 씨의 단편소설 ‘그 남자의 리허설’도 목욕 장면으로 시작해 목욕 장면으로 끝난다. 지리멸렬한 삶을 사는 성악가 남자와 잘 나가는 오페라 기획자 아내의 삶을 대비하면서, 소설은 그 남자가 욕조에서 휴식을 얻는 것으로 끝난다. ‘욕조 안에 들어가 반듯하게 몸을 뉘었다. 그의 몸 위로 철벙철벙 물줄기들이 떨어졌다. 무릎과 아랫배, 심장과 팔뚝, 어깨뼈와 목젖이 물에 잠겼다. 안온하고 따뜻했다.’
소설에서 펼쳐지는 남자의 인생은 한없이 비루하지만, 목욕할 때 남자는 잠시나마 평온하다. 숨차게 살아가는 우리 인생도 잠시나마 쉼이 필요할 것이다. 주말,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물에 몸을 안길 때 작품 속 인물들처럼 타인의 상처도, 나의 아픔도 안을 수 있을지 모른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