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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대통령과 헌법…재신임 카드서 개헌제안까지

입력 | 2007-01-13 02:57:00

2004년 3월 1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을 선포한 뒤 방망이를 두드리고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석에서 박 의장을 향해 안건 뭉치와 각종 물건을 던지자 국회 직원들이 손으로 막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년 동안 정치적 승부수를 던질 때마다 헌법을 거론하곤 했다.

9일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하면서도 그는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으로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 “임기 마지막까지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겠다”며 자신의 행동의 근거로 헌법을 제시했다.

변호사 출신인 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헌법’을 자주 거론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헌법이 문제’라고 비판하곤 했다. 그러나 유리한 국면에서는 ‘헌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지 않느냐’며 헌법을 치켜세웠다.

그런가 하면 예기치 않은 발언과 행동으로 논란을 야기하며 위헌 합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우도 많았다.

○ 헌법 논란을 던져 정치적 입지 강화?

노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2003년 말 자신의 대선자금 수사와 측근인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의 SK비자금 수수 의혹 등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렸을 때 ‘재신임 카드’를 던졌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 10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최도술 비서관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가 무엇이든 그동안 축적된 국민의 불신에 대해서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재신임을 묻는 방법으로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하지만 헌법 제72조는 ‘외교 국방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의 경우 이를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당연히 대통령의 재신임은 국민투표 대상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러나 당시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헌법학자의 해석이 필요하지만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을 국민투표로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이 던진 첫 번째 헌법 논란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에게 사퇴하라고 요구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는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이 재신임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한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이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다’라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9명의 헌재 재판관 중 4명이 소수의견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는 것이 위헌’이라는 의견을 냈다.

노 대통령이 이처럼 결론이 뻔한 재신임 국민투표 카드를 던진 것은 ‘대통령에 대해 함부로 정치적 공격을 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헌법적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도 국민투표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볼 때 다수 국가의 집권자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국민투표를 이용한 사례가 허다했다”고 지적했다. 헌재까지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를 경계한 셈이다.

노 대통령은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을 통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전체로 보면, 소득 없는 국민적 공방전만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 여론과 헌법 절차에도 상관관계가 있다?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상 한번도 적용이 안 됐던 탄핵소추 규정을 적용받은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노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은 것이 직접적인 촉매제가 됐다.

노 대통령은 2004년 2월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특별회견에서 “국민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이 발언에 대해 중앙선관위는 같은 해 3월 “선거에 있어 공무원의 중립 의무인 선거법 9조를 위반했다”고 결론을 내린 것. 이에 대해 청와대는 ‘존중하지만 납득하기 어렵다’며 불만을 표출했다. 또 선거관련법을 ‘관권선거시대의 유물’ 등으로 폄훼하기도 했다.

공무원의 선거 중립은 헌법상의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 의무에 대해서는 선관위의 지적처럼 별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3월 12일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하자 ‘역사적 죄인’, ‘하늘을 거스르는 짓’이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적절했는지 여부와 별개로 헌법과 법률에 따라 진행된 절차였다. 하지만 대통령 주변 세력들은 ‘감히 우리 대통령을 탄핵소추 할 수 있느냐’는 비헌법적 논리로 국회를 비난했던 것.

이들은 나아가 그런 비난 공세를 통해 조성된 ‘탄핵 반대 여론’을 헌법재판소의 탄핵 여부 최종 결정에서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내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당시 노 대통령의 주변 인사들은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해 법리 공방을 대비했다. 한 법대 교수는 “당시 청와대는 법조계 주류를 잡기 위해 총력전을 폈다. 심지어 탄핵과 관련해 언론에 한마디씩 코멘트 한 것을 모두 체크해서 좋은 의견을 낸 사람들을 모았다”며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청와대는 사력을 다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헌재는 ‘노 대통령의 발언과 행동이 위헌 위법이기는 하지만 면직할 만큼 중대한 위헌 사항은 아니다’라며 국회가 의결한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그러나 헌재는 기자회견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 선거에서의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등 일부 언행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점을 적시했다.

노 대통령은 헌재의 결정에 대해 “공정한 재판에 감사드린다”고 했을 뿐 헌법과 법률 위반했다는 지적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 ‘유리하면 좋은 법, 불리하면 나쁜 법’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획득과 5월 헌재의 탄핵 기각으로 힘을 얻은 노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을 강행하려 했다. 충청권의 표를 의식한 한나라당의 ‘방조’를 등에 업은 때였다. 2003년 12월 29일 압도적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한 신행정수도특별법이 2004년부터 공포 시행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이석연 변호사 등이 헌법소원을 제기함에 따라 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추진한 신행정수도가 또다시 헌재의 심판대에 올랐다.

헌재는 2004년 10월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관습헌법에 속한다”며 신행정수도법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결정했다.

청와대는 즉각적으로 “관습법이란 얘기는 처음 들어 본다”며 헌재를 원색적으로 공격했다. 청와대는 관습헌법의 중요성 및 수도 이전 비용과 효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의 전제 등을 주장하는 동아일보 등에 대해 파상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청와대브리핑에는 동아일보를 겨냥하고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극언도 등장했다.

탄핵 기각에 대해 ‘공정한 재판에 감사드린다’고 했던 것과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노 대통령과 그 주변 세력들이 ‘내게 유리하면 좋은 편이고, 내게 불리하면 나쁜 편’이라는, 편의주의적 흑백논리로 헌법과 헌법기관을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지적된다.

○ ‘헌법의 권한은 확실히 챙긴다’

노 대통령은 11일 개헌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지금까지 헌법과 법률에 부여된 권한만 행사했고, (이번에도) 개헌안이 부결되든 가결되든 법률상 권한을 착실히 행사하겠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개헌 제안은 법적으로 정당한 대통령의 권한 행사인데도 불구하고 ‘반대’부터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노 대통령이 ‘헌법상 권한’을 강조하는 것은 인사권 행사와 관련한 논란에서 두드러진다. 여론에서 문제 있다고 지적한 인사에 대해 노 대통령은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며 대부분 임명을 강행했다. 그것이 다른 헌법적 법률적 절차에 의해 좌절됐을 때 노 대통령은 거친 말로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을 철회하면서 “고유권한인 인사권도 제대로 행사할 수가 없다. 사사건건 시비가 걸리고 발목이 잡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효숙 사태’는 애초 청와대가 헌법재판관 중에서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토록 한 헌법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야당이 그 헌법 절차 미비를 지적하며 국회 임명동의에 응하지 않은 것도 나름대로 헌법과 법률에 의한 국회의 권한일 수 있다는 점을 대통령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비판이 나왔다.

박민혁 기자 mpark@donga.com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헌법학자들이 보는 논란 원인]

‘국민 뜻’ 외면한 채 권한만 강조… 정당성 잃어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 행사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

헌법학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 행사가 연이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의 모든 권한이 ‘국민의 뜻’을 담은 헌법에서 나오는 만큼 이를 행사할 때도 국민적 합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노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인 이석연 변호사는 12일 “노 대통령은 자신의 권한과 지위를 찾을 때는 헌법을 근거로 제시하면서도 정작 국민적 합의 절차와 정신은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헌재가 2004년 노 대통령 탄핵 사건을 기각해 대통령 권한을 회복해 주면서도 ‘국민적 합의 절차를 무시하고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대통령이 스스로를 멸시하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 경고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대통령 인사권에 대해서도 “자유재량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요건을 갖춘 사람을 국민 여론을 반영해 임명하라는 것”이라며 “‘내 권한을 내 맘대로 행사한다’는 대통령의 태도는 헌법을 폄훼하고 헌법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국대 법대 김상겸 교수는 “대통령이 헌법적 권한을 행사할 때는 잘못된 결과가 생겼을 경우까지를 고려해야 한다”며 “대통령에게 주어진 법률적 권한은 대통령의 권리이자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라고 말했다. 국민의 뜻을 충분히 검토한 뒤 권리 행사 여부를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개헌 발의권의 경우도 헌법 개정 필요성이나 실효성, 여론 등을 모두 감안해 행사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며 “이런 고려 없는 개헌 발의는 권한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대 법학부 조홍석 교수도 “헌법 개정처럼 국가 근본 질서를 바꾸는 문제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인 전제조건인데 아무 합의 없이 대통령이 불쑥 권한 행사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며 “국민의 뜻을 무시하면 결국 국민의 표로 정치적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