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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열기 속으로 30선]엄홍길의 약속

입력 | 2006-06-15 03:00:00


《“준호야 민아, 미안하다…. 우리가 너희를 찾으려고 정말 그 위를 샅샅이 뒤졌다. 우리가 그러는 모습, 너희들도 봤지? 너희들이 우리를 돌봐줘서 그나마 이렇게 무사히 일을 끝마쳤다는 거, 잘 안다. 고맙다. 미안하고 고맙다. 무택아, 너 먼저 간 다음에 정말 내가… 정말 내가…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니 소식 듣고 너 만나러 가겠다고 사람들한테 약속했었다. 너 데리고 내려오다가… 내가 알아차렸다. 너, 초모랑마를 떠나기 싫었던 거지?” 엄홍길은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초모랑마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날은 짙은 구름이 끼어 있었다. ―본문 중에서》

세계 등반 사상 유례가 없는 8750m 죽음의 지대에서의 시신 수습 작업.

이 책은 2005년 5월 29일 77일간의 사투 끝에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된 고 박무택 대장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성공한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악문학 전문 작가이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심산 씨는 직접 휴먼원정대의 대원으로 참여하여 원정대 출발에서부터 시신 수습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했다. 고인들의 개인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원정지에서의 생활 모습, 휴먼원정대원들 간의 진한 우정과 동료애 등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산사나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휴먼원정대를 이끌고 시신 수습에 성공한 엄홍길 대장과 고 박무택 대장의 우정은 죽음도 가로막지 못했다. 2000년 봄 칸첸중가 8500m 설산에서 죽음의 비바크(야영 장비 없이 야외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를 하며 생사를 함께한 두 사람은 K2와 시샤팡마,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지명) 등정에도 동행한 친형제 같은 사이였다. 그런 박 대장이 2004년 봄 에베레스트에 올랐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엄 대장은 바로 빈소가 차려진 대구 동산의료원으로 달려가 친구의 영정 앞에서 굳은 약속을 한다. 추위와 외로움에 떨며 설벽에 매달려 있을 친구를 꼭 데리러 가겠다고. 반드시 시신을 수습하여 따뜻한 세상의 품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그로부터 1년 뒤 엄 대장은 마침내 약속을 지켰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 14+2좌(8000m가 넘는 연봉) 완등의 마지막 목표인 로체샤르 원정까지 뒤로 미루고 휴먼원정대를 조직한 엄 대장은 2005년 3월 14일 18명의 원정대를 이끌고 히말라야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77일간의 사투. 계속되는 악천후로 한 차례의 시신 수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허리를 다치고 가래가 기관지를 막아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엄 대장은 유가족과의, 고인들과의,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끝내 백준호 부대장과 장민 대원의 시신은 찾지 못한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이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숭고한 희생정신과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켜 낸 산사나이들이 보여 주는 감동의 대장정이었다. 이 책은 원정대의 전체 활동을 생중계하면서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드라마를 보고문학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면서도 동료의 안위만을 걱정하던 고인들의 이야기, 생업을 팽개치고 그리움 속에 묻어 둔 친구의 시신을 찾아 나서는 산악인들의 끈끈한 우정, 죽음의 그림자를 등에 업은 채 거대한 자연과 맞서는 인간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한 편의 휴먼 다큐멘터리로 전해진다. 날로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서 인간애의 진정한 의미,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진짜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유승민 국가대표 탁구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