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를 주로 연구해 온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광복 전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대조적인 지도자 4인의 정치적 궤적을 살핀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을 펴냈다.
이 교수는 여운형에 대해 ‘호걸형의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하면서 그가 풍채도 좋고 운동도 잘했으며, 절충과 화해를 신조로 삼을 만큼 원만한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외세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당시의 국제정세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충돌하던 국내 정국에서 여운형의 호방함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이 교수는 냉정히 비판했다.
김구와 김규식의 좌우합작 노선에 대해 이 교수는 “심금을 울리는 고귀한 소망임에 틀림없었지만 남북 분단을 고정화한 스탈린의 1945년 9·20지령이 민족통일의 길을 모두 막고 있던 상황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꿈이었다”고 평했다.
반면 이승만은 스탈린의 심중을 정확히 읽어내고 남한의 보수세력을 규합함으로써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정치세력을 조직해 광복 후 2년여나 독립정부가 없는 상태로 외세의 지배를 받던 상황을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적 노선을 걸었다고 평했다.
이 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발표한 논문 중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과 관련된 논문만 선별한 이 책에서 1946년 좌우합작이나 1948년 남북협상이 소련의 배후조종에 의한 꼭두각시놀음이었다는 점도 자세히 규명하고 있다.
그는 “많은 학자들이 광복 전후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 특히 분단과 분단의 고착화에 관한 일들을 미국의 탓으로 돌려버렸고, 소련은 미국의 결정에 따랐을 뿐이었다는 억측을 하게 됐다”면서 “당시에는 미국 정부의 문헌과 기타 자료가 너무 많고 광범위한 데 비해 소련의 문헌은 참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38선 이북이 3년간 스탈린 정권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스탈린은 병적인 밀폐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자료를 밀폐해 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소련의 북한 점령기간 중추적 역할을 했던 시티코프, 레베데프 등의 비망록이 발굴됨에 따라 당시 소련군정이 북한을 통치했을 뿐 아니라 남쪽의 조선공산당의 정책도 관장하고 있었음이 규명됐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