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선방송위원회가 5월 말 남한 방송위원회에 월드컵 중계 협조 요청 공문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뿌라찌’였다. 브리지(bridge)가 일본어 발음으로 변형된 이 단어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흔했던 전기선이나 전화선 안테나 ‘절도’ 행위였다.
전기료나 전화 통화료, TV 시청료를 아끼기 위해 이웃의 선로에 ‘뿌라찌’를 해 더부살이하던 게 들통이라도 나면 동네에는 시끌벅적 시비가 일었다. 그럼에도 ‘뿌라찌’가 그 시절 국민정서법 기준으로 큰 죄로 여겨지지 않았던 한 대목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이라는 공감대를 건드렸을 때였다. TV 수신료는 아껴도 바보 장욱제가 나오는 TV 일일드라마 ‘여로’는 보고 싶은 욕망 말이다.
탈북자들이 고발하는 북한 내 인권유린 실상이 연일 국제사회의 첨예한 이슈가 되고, 남북이 약속한 경의선 동해선 시험운행은 시행 전날 북한의 일방적인 취소로 펑크가 났다. 그런 북한이 ‘월드컵 좀 보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일견 기괴하기까지 하다. 정말 북한 인민들은 지구촌에서 가장 상업적인 스포츠 쇼로 꼽히는 월드컵을 봐 오긴 한 걸까.
김일성대를 졸업한 뒤 2001년 탈북한 후배 주성하 기자에게 북한에서의 월드컵 시청 경험을 물었다. 부족한 전력 때문에 종일 방송은 엄두도 못 내는 북한에서 그는 1986년 이래 매회 월드컵의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주요 경기를 녹화 방송으로 보았다고 했다.
“1994년에 꼭 한 번 결승전을 못 봤어요.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해 그 다음 날부터 월드컵 방송을 끊었거든요.”
위성TV가 설치된 외교사절 전용 클럽을 출입할 수 있는 특권층은 구미에서 경기가 벌어지는 새벽 시간에 몰래 실황을 보다가 흥분해서 아들들에게 전화로 경기 상보를 전하면서 이렇게 통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야, 우리나라 인민들은 축구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월드컵 본선에 못 나가니?”
그런 북한 사회에 2002년 월드컵 녹화 방송은 일대 문화 충격이었다. 그 이전까지 남한 출전 경기는 일절 방영하지 않아 대진표에서 이름이 지워진 나라가 있으면 ‘남한이구나’ 하고 짐작했다는 북한 인민들. 남한의 4강 진출은 물론이고 월드컵 개최 자체가 남한의 힘을 각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정부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북한 측에 요구하는 중계권료가 방송발전기금으로 충당이 안 되면 남북협력기금으로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인민의 굶주림은 해결하지 못하면서 ‘월드컵 중계’는 보여 주겠다는 북한 정권을 지원해야 할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믿어 볼 것은 정보는 통제자의 뜻대로만 요리되지 않는 ‘생물’이라는 점이다.
베트남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5년 6개월간 수용소 생활을 했던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은 석방 후 자신이 수용소에서 가장 목말라 했던 것은 편안함이나 맛있는 음식, 자유, 심지어 친구나 가족도 아니고 “검열하거나 왜곡되지 않은 자유롭고 풍부한 정보였다”고 말했다.
축구는 고립된 북한 사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다. 호나우지뉴와 지네딘 지단 그리고 박지성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는 월드컵 무대에 서고 싶다는 소망을 북한 인민들이 가질 수 있다면 자포자기보다 낫다.
교시보다는 이루고 싶은 크고 작은 욕망이 살아갈 힘이 되고 변화의 에너지가 되기는 남이든 북이든 마찬가지다.
정은령 문화부 차장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