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 국가들의 협의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이 흔들리고 있다.
창설 15년을 맞아 일부 회원국이 ‘맏형’ 격인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이탈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 지역에서 세력 확대를 노리는 미국의 부추김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반란=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는 사사건건 러시아와 충돌하며 CIS 탈퇴 직전까지 간 상황이다. 두 나라는 서방의 지원을 받은 민주화 시민혁명을 통해 차례로 정권 교체를 이룬 뒤 ‘친(親)서방 탈(脫)러시아’ 노선을 걸어 왔다.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CIS 무용론’을 제기하고 있다.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은 CIS에서 탈퇴할 경우의 득실을 연구하라고 지시해 둔 상태.
이에 대해 러시아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와의 가스 공급 가격 협상이 실패하자 일방적으로 가스 공급을 중단해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전 유럽을 경악시켰다.
러시아는 또 3월부터 그루지야산 포도주와 생수(미네랄워터)의 수입을 금지했다. CIS 회원국이면서도 미국 등 서방과 더 가까운 두 나라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경고를 보낸 것.
두 나라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해 서방세계로 편입되는 것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어 심정적으로는 이미 CIS를 떠난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에너지 공급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러시아의 보복을 우려해 탈퇴 결행의 시기를 미루고 있을 뿐이다.
▽반(反)러 구심점 GUAM=이런 상황에서 22, 23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릴 GUAM 정상회의가 주목받고 있다.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몰도바의 머리글자를 따 지은 이 기구는 1997년 창설됐다.
아제르바이잔과 몰도바 역시 러시아보다는 미국 등 서방과 가깝다. 지난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은 이달 초 미국 방문 당시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카스피 해 유전 개발과 송유관 건설을 계기로 밀접해진 것.
블라디미르 보로닌 몰도바 대통령도 지난해 3월 총선을 계기로 반러 친서방 노선으로 돌아섰다. 특히 몰도바는 자국산 포도주에 대한 러시아의 수입 금지 조치에 반발해 16일 이 사안을 세계무역기구(WTO) 협상과 연계하겠다며 제동을 걸었다.
전문가들은 CIS의 균열은 GUAM 4개국에서부터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다.
▽눈치 보는 나머지 나라=대부분의 CIS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에너지와 안보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지만 2001년 9·11테러 후 ‘대테러 전쟁’을 명목으로 이 지역에 들어온 미국이 경제 지원을 내세워 영향력을 확대하자 동요하고 있는 것.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달 초 “CIS 지역에서 미국의 합법적 권리를 인정하라”고 러시아에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국가가 CIS에서 이탈하거나 최악의 경우 전신인 옛 소련처럼 해체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