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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심규선]기상청을 위한 변명

입력 | 2006-05-18 03:00:00


얼마 전 황사예보를 잘못했다고 해서 기상청장이 공개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대학시절에 봤던 연극 한 편이 떠올랐다. 제목이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이강백 작)였다. 그깟 날씨쯤에 심지(心志)가 흔들리겠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연극 제목과 달리 우리는 날씨에 매우 민감하다.

그렇지만 기상청장까지 나와 고개를 숙여야 했을까. 평소엔 누릴 것 다 누리고, 종국에는 나라살림까지 거덜 내고도 사과는커녕 “당시로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며 고개를 빳빳이 드는 공무원들을 많이 봐 온 때문인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기상청은 1998년 지금의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새 청사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종로구 송월동 서울교육청 옆의 언덕배기에 있었다. 신참 기자 시절에 4년 가까이 기상청(당시는 중앙기상대)을 담당했던 기자는 추석이나 설날이 다가오면 회사에서 주는 봉투를 들고 기상대를 찾곤 했다. 명목이야 평소에 기상도를 공짜로 받아 쓰고 있는 데 대한 사례였지만, 사실은 ‘욕만 얻어먹는’ 기상대 직원들에 대한 ‘위문’이었다. 그리 많은 돈도 아니었지만, “신문사에서 ‘촌지’를 받는 곳은 기상대가 유일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한 기억이 난다. 기상업체로부터 가공된 기상정보를 사서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관행도 사라졌다.

이쯤에서 ‘그럼 예보를 잘못해도 마냥 봐주라는 얘기냐’는 불평이 나올 법하다. 물론 아니다. 다만 예보는 천변만화하는 자연현상의 한 자락을 엿보는 확률의 과학이어서 100% 정확한 예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다.

예보는 관측과 감시, 자료 수집과 정리, 예측, 전파의 연속 과정이다. 예측은 인간(예보관)과 기계(슈퍼컴퓨터)가 함께하지만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예보 적중률을 높이려면 더 많은 곳에서, 더 정확한 자료를 얻어야 하고, 더 정교하고 다양한 수치예보 모델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산, 기술,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예보력도 국력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수치예보 모델의 성능은 유럽중기예보센터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독일 캐나다 중국 호주에 이어 10위로 평가받고 있다. 결코 동네북이 될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있을 때도 아니다. 한국에 적합한 수치예보 모델의 정교화, 국지적 악기상(惡氣象)이나 돌발기상 예보모델 개발, 유능한 인재 육성과 긴밀한 국제 협력, 소비자 만족을 높이기 위한 정보 가공 및 전파 기술 개발 등 업그레드해야 할 분야가 한두 곳이 아니다. 황사도 새로운 도전이다. 변명은 한 번으로 족하다. 기상청의 역량과 자존심을 걸고 새로운 도전에 맞서야 한다. 게으름은 틀린 예보보다 더 나쁘다.

기관 이기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기상청은 1987년 7월 대형 태풍 셀마가 남해안에 상륙했는데도 대한해협으로 빠져나갔다고 진로를 조작해 발표했다. 상륙 전의 예보도 똑같았다. 이 때문에 태풍 피해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당시 기상청은 자신들만 아는 전문용어를 동원해 가며 “예보 잘못은 없었다”고 우겨 댔다. 그렇지만 6개월이 지난 뒤 영구보존판인 ‘기상월보’를 통해 슬그머니 잘못을 시인했다. 이 사건은 어처구니없게도 “셀마는 대한해협으로 빠져나갈 것 같다”고 한 예보가 틀린 것을 덮으려다 빚어진 일이었다. 비난이 두려웠던 것이다. 잘못된 예보는 곧바로 인정하고, 고치고, 전파해야 한다. 날씨예보만큼 직접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영향을 주는 것도 드물다. 기상청의 체면은 아무것도 아니다.

연극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는 해피엔딩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 허름한 하숙집에 머물던 처녀는 하숙집 아들과 사랑에 빠지지만, 비가 개자 사랑을 부정한다. 그러나 하숙집 아들은 “나는 날씨에 따라 변하진 않는다”며 처녀를 설득해 결국은 사랑을 얻는다. 하숙집 아들처럼 날씨예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약간의 아량을 보여 준다면 기상청은 더 정확한 예보로 보답할지 모른다. 곧 장마와 태풍의 계절이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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