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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저 웨딩드레스…”

입력 | 2006-04-21 03:03:00

럭셔리 웨딩드레스는 결혼식을 앞둔 여성들의 꿈이다. 사진의 드레스는 베라 왕 제품으로 1900만 원. 모델=김문숙 헤어&메이크업=3스토리 바이 강성우 촬영협조=롯데백화점 에비뉴엘


《결혼식 날만큼은 공주가 되고 싶은 게 여성들의 꿈. 특히 패션 감각이 남다르고 자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1970년대 중후반과 1980년대생들이 결혼할 나이에 이르면서 럭셔리 웨딩드레스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베라 왕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웨딩타운의 디자이너 숍을 통해 럭셔리 웨딩드레스 문화를 들여다봤다.》

10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2층의 웨딩드레스숍 ‘베라 왕’ 매장. 녹색의 에르메스 켈리백을 든 60대 여성이 들어왔다. 전시된 제품을 둘러보다가 “요새는 다 이렇게 파진 것을 입나?”고 하던 그의 시선이 톱과 스커트, 레이스 볼레로의 스리피스 드레스에 멈췄다.

“이렇게 세팅하면 900만 원입니다.” 단정한 블랙 정장의 숍 매니저 김민정 씨가 말했다.

“빌려도 주나요?” “저희는 판매만 하고 있습니다.”

잠시 뒤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이 매장을 방문했다. 이날 계약을 하려는 참. 금융계에 종사한다는 예비 신랑(35)은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이니 신부에게 드레스를 사 주고 싶었다”며 “청담동 웨딩숍에서 사려 하니 대여가의 세 배를 부르더라. 여기가 비싸다는 생각은 안 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했다. 불가리 시계를 찬 손으로 쥔 영자 신문에 몽블랑 만년필로 필기해 가며 설명하는 모습이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예비 신부(34)는 “연예인들이 입는 수천만 원짜리 드레스가 사치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결혼을 하려니 ‘나만의 드레스’를 갖고 싶었다”며 “보관했다가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남편에게 섭섭할 때마다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선택한 드레스가 얼마인지 물었다. 김 씨는 “드레스를 작품으로 여기기 때문에 높은 가격만 내세운 기사에 민감하다”며 말해 주지 않았다. 그가 잠깐 나간 틈을 타서 예비 신랑에게 슬쩍 물었다. “비싼데, 2000만 원이 좀 넘네요.” 숨이 턱 막혔다.

다음 날 오후, 다시 매장을 찾았다. 옆 보석 매장의 직원이 “어제 다녀간 ‘그 사모님’의 따님”이라며 20대 여성을 안내했다. 펑퍼짐한 청바지에 또래 여성보다 수수한 차림이다. 그 밖에도 고가의 악어 가죽 가방을 들고 “너무 비싸다”고 하는 사람도, 문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탤런트 김남주도 심은하도 입었다는 베라 왕은 고가의 ‘럭셔리 웨딩드레스’다. 영국 프로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의 부인인 빅토리아, 가수 제시카 심슨, 배우 제니퍼 로페즈와 케이트 베킨세일이 이 드레스를 입었다. 이 브랜드의 웨딩 드레스는 지난해 3월 한국에 진출한 뒤 결혼을 앞둔 신부들의 화제로 떠올랐다. 베라 왕은 미국 패션지 보그의 에디터와 랄프로렌 디자인실장을 지낸 중국계 미국인 디자이너 베라 왕이 1990년에 만든 브랜드다.

○ 1000만 원대 드레스 많이 골라

위 사진은 실크 태피터 소재에 가슴부분과 밑단에 블랙 레이스를 단 유럽풍의 애프터 드레스(권형민 웨딩와이즈).

베라 왕의 드레스 가격은 500만∼3500만 원 선이며 예비신부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은 1000만 원대 안팎. 한국에 수입된 것은 기성복이고 빅토리아 베컴처럼 새 디자인으로 맞추려면 가격은 억대로 올라간다.

베라 왕 코리아의 정미리 대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에 다른 사람이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며 “얼마 전 결혼식에서 어머니가 35년간 보관해 온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는 신부의 말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웨딩드레스의 대물림이 흔하다.

매장을 방문하는 이들의 90%는 베라 왕을 구경하러 온다. 실제로 계약을 하는 10%는 정·재계 인사의 자녀이거나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가 대부분. 그래서 ‘베라 왕의 손님들은 가격을 묻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기업가(家)의 자녀들도 가격을 깎아 달라고 한다.

신부의 나이는 갓 대학을 졸업했거나 서른을 훌쩍 넘어 스스로 경제력을 갖춘 이들이 많다. 재혼인 듯한 예상을 깨고 결혼기념일마다 입겠다며 드레스를 산 40대 여성도 있었다.

평소 뛰어난 패션 감각을 보여준 김남주는 김승우와 함께 와서 단번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골라냈다. 심은하는 시어머니와 함께 와서 세 벌을 입어본 뒤 시어머니가 고른 드레스를 선택했다.

정 대표는 “상위 1%가 주고객이지만 반드시 최상류층만 찾아오는 게 아니며 평범한 직장인들도 있다”고 말했다. 결혼전문 월간지 마이웨딩의 이혜원 편집장은 “결혼을 준비할 때 다른 부분을 줄이고 특정 분야만 최고급으로 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웨딩드레스에 대한 투자가 과감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왼쪽부터 실크 오간자 소재에 크리스털 장식의 드레스와 슬림 머메이드 라인의 실크 시폰 드레스(황재복 웨딩클래식), 낮은 허리선에 25겹의 망사 스커트가 화려한 드레스(권형민 웨딩와이즈)

○ 한국의 럭셔리 드레스

1964년 배우 신성일 엄앵란이 결혼할 때 엄앵란의 웨딩드레스는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만들었다. 이 시절의 럭셔리 웨딩드레스는 친분있는 디자이너에게 제작을 의뢰하거나 주로 명동에 있던 의상실에서 맞췄다. 1970, 80년대에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웨딩타운이 드레스의 중심지였으나 상류층을 흡수하지는 못했다. 90년대 초 럭셔리 브랜드 바람이 불고 강남이 패션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웨딩숍들도 청담동으로 모여들었다. 1999년 특급호텔 예식이 허가되면서 럭셔리 드레스 시장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웨딩 컨설팅 ‘써니플랜’의 최선희 실장은 “청담동 주변에 100군데가 넘는 웨딩 숍이 있지만 그중 연예인과 상류층이 선호하는 숍은 10여 군데”라고 말했다. 이들 숍에서 맞춰서 입고 반납하는 맞춤 대여는 300만∼500만 원. 다른 사람이 입었던 것을 입는 일반 대여는 맞춤 대여의 70% 정도 가격이다.

탤런트 한가인과 노무현 대통령의 딸 정연 씨의 드레스를 만든 ‘황재복 웨딩 클래식’의 황재복 씨는 클래식 스타일을 추구한다. 탤런트 정혜영과 모델 변정민의 드레스는 ‘권형민 웨딩 와이즈’의 권형민 씨 작품으로 로맨틱 무드가 특징.

오연수 김지호 박주미가 입었던 ‘라마리에’는 SBS TV 드라마 ‘파리의 연인’ 김정은 드레스로도 유명하다. 몸의 선을 따라 흐르는 실루엣이 아름답다는 평. ‘노비아’의 드레스는 김원희와 박신양의 부인 백혜진 씨가 입었다. 튀고 싶은 신부들을 위해 개성을 강하게 드러낸 디자인도 많다. ‘이명순 웨딩드레스’ ‘김민주 웨딩컬렉션’과 용산구 이태원동의 ‘김지나 레아’ 등도 손꼽히는 숍이다.

최근에는 수입브랜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탈리아 드레스인 ‘친지아 페리’, 신라호텔에 있는 독일 브랜드 ‘에스까다 웨딩’ 등이 인기. 최근 문을 연 친지아 페리의 세컨드 브랜드 ‘에스메랄다 웨딩’도 이탈리아 수입 드레스를 취급한다. 개그맨 신동엽과 결혼하는 MBC 선혜윤 PD가 에스메랄다 웨딩의 드레스를 입을 예정이다.

○ 제작에만 두세달 걸려

디자이너들은 “럭셔리 웨딩드레스의 높은 가격은 디자인과 소재의 차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명 디자이너의 드레스는 곧 ‘○○○ 스타일’이라 불리며 다른 숍들의 베끼기 대상이 된다. 최근엔 보수적인 유럽풍 디자인보다 노출이 있는 아메리칸 스타일이 유행하고 있다. 어깨를 드러내는 튜브톱 드레스가 많고 스커트 라인은 몸의 곡선을 따라 내려가다 밑단만 살짝 퍼지는 머메이드(인어) 라인이나 이를 변형한 스타일이 많다.

디자인은 단순하되 소재로 승부하는 게 고급 드레스. 심은하가 입었던 드레스는 ‘더치 새틴’이라는 실크 중에서도 은회색이 도는 오묘한 빛깔이 굴과 비슷해 ‘오이스터 컬러’라 불리는 색의 원단으로 만들었다.

디자이너 권형민 씨는 “럭셔리 드레스는 한 사람의 고객만을 위해 100%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오트 쿠튀르(최고급 맞춤복)”라며 “1야드(91.44cm)에 몇만 원에서 수십만 원까지 하는 원단을 쓰는데 겉감을 만드는 데만 10야드 이상 쓰인다”고 말했다. 보석 장식을 하면 가격이 더 올라가는데 수천 개의 크리스털을 일일이 손으로 붙이는 경우도 있다. 최고급품은 제작에만 두세 달이 걸린다.

럭셔리 웨딩드레스의 높은 가격은 숍의 유지 비용이나 수입업체의 이윤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비싸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아현동에서 청담동으로 이전한 숍들이 내부 인테리어 등을 업그레이드 한 뒤 같은 드레스를 가격만 올려서 판다’거나 ‘수입 드레스의 가격이 현지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소문도 있다.

권 씨는 “결혼식은 축복을 받아야 하는 의식”이라며 “유행과 욕심때문에 본인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스타일로 가지 말고 자기만의 독특하고 합리적인 결혼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톱스타 누구가 그 드레스를 입었더라…”▼

웨딩업계에서 ‘톱스타 누구가 누구의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은 영향력이 큰 뉴스다. 결혼 발표가 나자마자 브랜드들은 스타의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 단골 미용실 직원까지 접촉하며 협찬 전쟁에 들어간다. 홍보대행사의 관계자는 “일부 업체는 스타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드레스를 입도록 부탁한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무료 협찬을 마다하는 디자이너들도 있지만 많진 않다.

한 웨딩숍의 매니저는 “광고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아는 연예인들도 협찬을 당연하게 여긴다”며 “심지어 왕년의 유명 연예인이 찾아와 동생이 결혼하는 데 드레스를 협찬해 달라고 해서 난감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연예인 결혼식을 여러 차례 주관한 ‘아이웨딩’의 윤현철 팀장은 “해당 연예인의 ‘그레이드’에 따라 협찬 형태도 다양하다”고 말했다. 인기가 높지 않거나 이미지가 드레스와 맞지 않으면 웨딩 숍에서 퇴짜를 놓는 일도 많다는 것이다. 윤 팀장은 “고가 브랜드일수록 브랜드의 가치와 이미지에 어울리는 스타들을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마이웨딩 이혜원 편집장은 “스타 마케팅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을 나쁘게 평가할 순 없다”면서도 “드레스의 질이나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고려없이 스타 마케팅만을 좇는 것은 지속적인 고객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말했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