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교 시절 학기 초가 되면 늘 곤혹스러워지곤 했다.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의 가정환경을 조사하면서 교실에서 손을 들도록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선 학교에서 도대체 왜 그렇게 비교육적인 일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모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에서는 아이들 사진 하나를 학교 소식지에 싣더라도 학기 초 보호자의 동의를 얻도록 한 지 오래다.
담임선생님이 정해진 양식(樣式)에 따라 부모의 직업과 교육 정도, 월수입과 재산, 주거 형태와 문화시설 등을 하나하나 물어 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때론 씩씩하게, 때론 침울한 모습으로, 이따금 잘못인 줄 뻔히 알면서 거짓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가정환경’을 학우들 앞에 드러내야 했다.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1960년대 초 서울 변두리 초등학교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학부모가 드문 시절이어서 대졸 부친을 둔 아이는 손을 번쩍 치켜들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무학(無學)이거나 서당교육을 의미하는 한학(漢學)에 해당하는 부모를 둔 아이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마지못해 손을 들었다. 초등학교만 마친 학부모도 적잖았기에 고졸만 해도 손색없는 학벌이었다. 아버지가 구멍가게를 하는 아이들 가운데는 상업 또는 회사원 쪽으로 손을 들었다. 나 자신 아버지가 중졸이었으나 슬그머니 고졸 쪽에 손을 든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부친이 의사 판검사 은행원인 집안의 아이들은 의기양양하게 손을 들었으며, 친구들은 다들 부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주거 형태와 월수입에 대한 문항은 더욱 가슴 아프다. 학생들은 자가 전세 월세 하숙 자취 등 어느 곳에서 살고 있는지 손을 들어야 했고, 아버지의 월수입이 어느 정도인지를 밝혀야 했다. 우리 아버지는 얼마짜리 아버지고, 너의 아버지는 얼마짜리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단칸 셋방에 사는 아이에게 공부방을 따로 갖고 있다는 친구는 ‘미국 아이’처럼 비치던 시절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빈부 격차가 가장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문화시설’이었다. 당시만 해도 승용차 TV 냉장고 피아노 풍금 전축 라디오 카메라 자전거 등이 귀중품으로 꼽혔다. 집에 승용차나 피아노가 있다고 손을 든 은행지점장 집 아이에게는 “와” 하는 함성이 쏟아졌다. 카메라와 자전거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기죽기 싫어 슬그머니 손을 드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한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나 돌이켜 보니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평준화 초기라서 그런지 비교적 먼 거리에서 통학하는 학생들 중에 ‘말죽거리’라는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곳이었고, 주민 상당수가 비닐하우스 영농 등으로 생계를 꾸리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고 사람도 쉬어 가던 데서 이름이 유래한 그 동네가 바로 지금의 지하철 3호선 양재역 일대다. 요즘 친구들은 “그때 공부하지 말고 수업료와 과외비로 말죽거리에 땅이나 사둘 걸 잘못했다”며 농담을 하곤 한다. 우리 세대에 말죽거리는 ‘잔혹사(殘酷史)’가 아니라 ‘투기사(投機史)’인 셈이다.
요즘 아이들은 다행히 집이나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를 개별 작성해 제출한다고 한다. 호기심이 발동해 10여 군데 초중고교의 조사서를 모아 봤더니 과거와 같은 비교육적 사례는 많이 없어졌다. 하지만 부모의 학력이나 직장 및 직위, 가족의 동거 여부, 다니는 학원 이름, 신체적 특징 같은 것은 왜 적어 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학부모의 신상과 생활수준이 자칫 교사에게 선입견을 갖게 하거나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이혼과 별거가 늘어나 전통적 의미에서의 ‘온전한’ 가정이 줄어 가는 세상에 ‘가정사’가 불가피하게 노출되거나 거짓 표기됨으로써 아이의 가슴에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