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잘못됐을 때 이를 ‘제도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좌파(左派)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국가관리능력 부재로 빚어진 빈곤층의 확산을 양극화(兩極化)라는 정치적 구호로 포장하는 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제도 탓을 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6월 여야가 합의해 도입한 기초의원 유급제와 정당공천제의 ‘잘못된 결합’이 만들어 낸 ‘공천 광풍(狂風)’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대립해 온 여야가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도입에 쉽게 합의한 명분은 ‘책임정치’의 구현이다. 하지만 실제는 국회의원들의 ‘통제 밖’에 있는 기초의원과 단체장들을 확실히 장악하겠다는 정략적 이해타산의 결과물이다. 지역할거 구도 속에서 ‘정당 공천=당선’의 등식이 성립하고 지역구 의원이나 당원협의회장이 공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됐으니, 공천 장사가 성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지방행정의 질 향상’을 명분으로 도입된 유급제로 연 3000만∼5000만 원이라는 ‘떡’까지 생기게 되자 지역 유지나 건설업자들이 주로 군침 흘리던 지방의원 자리는 일약 변호사나 다른 전문직종 종사자들까지 노리는 매력 있는 직종으로 바뀌었다.
광복 직후나 4·19혁명 직후의 열기를 다시 보는 듯한 지방의 ‘정치 폭발 현상’은 최근 들어서는 기업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지방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A 씨는 “지방선거에 출마하겠다며 도와 달라는 선후배의 요구가 하도 빗발쳐 아예 휴대전화를 꺼 놓고 지낸다”고 말했다.
국회의원들로서도 견물생심(見物生心)의 본능이 작동할 만하다. 한 야당 의원의 토로는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기업의 후원금 받는 것도 막아 놓은 개정 정치자금법으로 돈 만들 길은 막막한데, 지방선거 예비후보자가 돈 싸 들고 찾아올 때마다 ‘안 되면 돌려주더라도 일단 받고 볼까’ 하는 유혹을 한두 번 느낀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 도입은 출발점부터 정치공학적 계산이 작용한 결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단식(斷食)투쟁까지 벌이며 지방자치제도 도입에 매달렸던 것은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여당보다 취약한 지방의 ‘풀뿌리 선거조직’을 강화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 점에서 지자제는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성장, ‘3김(金) 정치’와 집단이기주의 등 명(明)과 암(暗)이 혼재하는 ‘1987년 체제’의 한 산물이다.
최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전문가집단인 지방자치학회 회원 158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응답자의 53%가 ‘지방선거제도가 개악(改惡)됐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대다수 전문가는 지난해 여야 협상과정에서 흐지부지된 주민소환제도를 도입해 지방행정에 대한 주민감시 체제를 강화하고, 기초의원뿐 아니라 단체장의 정당공천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정치권의 정략적 이해타산이 만들어 낸 공천 광풍의 궁극적 해법은 ‘도둑놈 잡기’가 아니다. 도둑질하고 싶은 ‘유혹의 구조’를 없애는 일이다. 잘못된 제도는 하루빨리 바꾸어 국민을 ‘정치 과잉의 공해(公害)’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이런 걸 놔두고 ‘정치 개혁’을 입에 담는 것은 대(對)국민 사기(詐欺)거나 코미디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