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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41년 아우슈비츠 독가스 대학살

입력 | 2005-09-03 03:04:00


“방에는 샤워기가 달려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몸을 씻으라고 했다. 수건과 비누까지 나눠주었다.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앞에는 그들이 샤워를 마친 후 입으려고 벗어놓은 옷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루돌프 회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물론 그들은 옷을 다시 입지 못했다. 문이 닫히면서 독가스가 퍼졌다. 10분 정도 지나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20분이 흐른 후 이마저도 조용해졌다.

시신은 소각로로 옮겨졌다. 나중에는 소각로가 너무 좁아 야외에서 시신을 태웠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시킨 소련군들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타는 냄새’였다.

1940년 5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세워졌다. 나치는 유럽의 중심 폴란드의 오시비엥침 지역을 수용소 위치로 잡았다.

이곳에서 처음 사용된 ‘살인 무기’는 자동차 배기가스. 나치는 무덤으로 가는 트럭 뒤편에 배기가스를 틀어놓고 포로들을 질식시킨 뒤 곧바로 매장했다.

1941년 9월 3일 독가스 처형이 시작됐다. 독가스는 자동차 배기가스보다 대량학살에 용이했다. 독가스로 사용된 ‘치클론-B’는 원래 수용소에 들끓는 이를 잡기 위한 살충제였다. 처음에는 주로 소련군 포로와 공산주의자들이 독가스 처형 대상이었다.

1942년 중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의 막이 올랐다. 나치는 1000만 명이 넘는 유럽의 유대인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몰살시키기로 했다. 유럽 전역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밀려들었다.

많을 때는 하루 9000명의 유대인이 독가스실로 끌려갔다. 독가스를 마시고 죽어간 사람은 150만 명. 홀로코스트 때 죽은 유대인 600만 명 중 4분의 1이 아우슈비츠에서 숨졌다. 1945년 1월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군은 7000kg이 넘는 머리카락을 찾아냈다. 독가스실로 끌려간 죄수들로부터 잘라낸 것이었다.

올 1월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식이 오시비엥침에서 열렸다. 한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연설에 참석자들은 고개를 숙였다.

“세계는 아우슈비츠로부터 무슨 교훈을 얻었는가. 여전히 인종과 피부색,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싸우고 죽이고 있다. 오늘은 기념식이므로 이에 대해 말하지만 내일이면 잊을 것이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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