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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코드…2000년의 비밀]무령왕의 왕관에 깃든 靈氣무늬의 비밀

입력 | 2005-08-29 03:07:00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의 왕(왼쪽)과 왕비의 관식. 왕관의 장식은 불꽃같은 율동감과 상승세를 보여주며, 왕비의 것은 고요한 느낌을 준다. 사진 제공 강우방 교수


《고구려에서처럼 백제의 왕릉 역시 남김없이 도굴 당한 것으로 모두가 체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옛 수도였던 공주와 백제의 국립 박물관들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공주의 발굴 유물은 더욱 희귀하여 적막하였다. 백제의 영화(榮華)는 전설로 신라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1971년 7월, 고스란히 묻혀 있었던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은 세기적 대사건이었다. 신문기사를 보고 그 이튿날 경주에서 달려간 나는 그 텅 빈 무령왕릉 안에 한참 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이미 발굴은 폭우 속에 어젯밤에 끝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박물관에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한다고 하여 중요한 작품들을 포장하는 일을 도왔는데 그 두 쌍의 금제관식(金製冠飾)을 내 손으로 쌌다. 그로부터 35년 만에 그 금제관식에 나타난 영기(靈氣)의 구조를 밝히려 한다.》

○ 불꽃처럼 상승기운 표현한 백제 왕과 왕비의 관식

백제의 왕, 왕비의 관과 관련된 금제장식은 신라 것과는 전혀 달랐다. 관 자체는 부식돼 없어지고 각각 한 쌍의 관식만 남아 있다. ‘구당서(舊唐書)’에 ‘백제의 왕은 검은 비단관(오라관·烏羅冠)을 쓰고 금 꽃으로 장식하였으며 신하들은 은 꽃을 사용했다’고 기록된 것과 일치했다. 무령왕이 썼던 전체 높이 30.7cm인 왕관의 금제 장식은 전체적으로 불꽃같은 율동감과 상승세가 있는 데 반해, 왕비의 것은 여성의 것이어서인지 고요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들은 다만 장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요, 심오한 우주관이 응축된 ‘사상(思想)의 꽃’이다.

왕의 것을 자세히 보면, 반(半) 팔메트(중동에서 유래한 좌우대칭 구조의 식물상징) 무늬가 좌우로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서 아름답고 힘찬 곡선을 이루며 위로 뻗어 올라간다. 그 좌우 사이에서 연잎과 연꽃이 피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그 연꽃에서 다시 작은 팔메트가 뻗어 올라가고 있는데 가운데에 팔메트가 있고 그 좌우에 반 팔메트 무늬로 구성돼 있다. 연꽃 좌우의 여러 갈래의 반 팔메트는 유려한 곡선을 지으며 뻗어 올라가고 있으며 가장 밑에는 팔메트가 좌우 아래로 뻗쳐 내려가고 있어 그 윗부분과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좌우대칭을 깨뜨리고 있다. 이 관식에는 모두 127개의 작고 둥근 금장식이 화려하게 달려 있다.

이에 비해 전체 높이 22.6cm인 왕비의 것은 단정하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 중앙에 항아리 같은 것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팔메트가 있고 그 좌우로는 두 개씩 반 팔메트가 뻗치고 있다. 항아리 좌우로는 각각 세 가닥의 팔메트가 곡선 형태로 위로 뻗치고 있으며, 중앙의 팔메트 갈래 가운데에서 연꽃이 피어오르고 다시 그 연꽃에서 팔메트 무늬 하나가 뻗어 올라가며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관장식의 도상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 퉁거우 사신총 팔메트 덩굴무늬의 영기무늬 구조

불상(佛像)의 경우는 주로 광배에 부처의 몸과 정신에서 발산하는 영기를 표현하나, 왕의 경우는 왕관에 그것을 나타낸다. 그 형태와 상징의 원형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퉁거우(通溝) 사신총 천장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다. 팔메트가 반으로 갈라진 사이로 연꽃이 피어나고 있는 형상이다. 반 팔메트는 각각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칠하였고 연꽃 세 잎은 흰데 가장자리를 붉은색으로 칠하여 갓 핀 연꽃을 나타내고 있다. 이 팔메트 덩굴무늬를 자세히 보면 반 팔메트와 덩굴 이곳저곳에 영기의 싹이 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반 팔메트 무늬를 빌려서 영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식물무늬라면 그런 영기의 싹이 돋아날 리 없다. 그러니까 ‘팔메트 모양의 영기무늬’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면 이 무늬의 도상 해석을 시도해 보자.

동양에는 우주만물이 영기에 태어난다는 영기화생(靈氣化生)의 사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일본 학자 이노우에 다다시(井上正) 선생이 최근 운기화생(雲氣化生)이란 새로운 용어를 써서 그러한 사상의 조형화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런데 운기(雲氣)라고 하면 구름만을 연상하기 쉬우므로, 나는 신령스러운 영기 즉 영기무늬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한한 형태로 몸을 나타내는 법이다. 바로 퉁거우 사신총의 무늬는 팔메트 모양의 영기에서 연꽃이 화생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결국 이 영기의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구려 고분 벽화인 중국 지린성 지안의 퉁거우 사신총 천장에 그려진 영기 무늬(오른쪽은 개념도). 곳곳에 영기의 싹이 트고 있는 팔메트 사이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이다. 우주만물이 영기에서 태어난다는 사상을 형상화했다. 사진 및 그림 제공 강우방 교수

○ 연화화생과 영기화생의 융합

인도에서는 만물 생성의 근원이 연꽃이라 한다. 인도의 근본 신인 비슈누의 배꼽에서 연꽃이 생기고 그 연꽃에서 브라마(梵天)가 탄생하여 그가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불교미술에서 연화화생(蓮華化生)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의 우주 생성관을 바탕으로 영기화생이란 용어를 최근 제기하면서 그 두 나라의 조형이 퉁거우 사신총의 영기문에서처럼 주종(主從)관계를 이루며 융합되었음을 처음으로 밝히게 되었다. 연화화생이란 사상이 중국에 수용되면서 더 근원적인 중국의 영기에서 연꽃이 생겨나고 있으니, 중국의 영기화생이 주(主)가 되고, 인도의 연화화생이 종(從)이 돼버린 셈이다. 이러한 두 사상과 조형성이 융합된 흥미로운 무늬가 중국에서 성립되어 고구려와 백제에 전해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원리를 융합시킨 조형원리를 아름답고 화려하게 나타낸 것이 바로 무령왕릉의 금제 장식들이다.

그런데 백제의 소규모의 횡혈식 석실분에서는 은제관식(銀製冠飾)이 출토되고 있다. 얇은 은판을 길게 오려서 줄기로 만들고 좌우로 영기무늬가 두 줄기 혹은 세 줄기 뻗쳐 올라가며 끝에서 연꽃 봉오리가 나오는 형상이다. 매우 간략하나 역시 영기무늬에서 연봉이 생겨나는 영기화생의 모양이다. 좌우를 V자 모양으로 접어 모자 앞에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결하고 무늬가 아름다우며 군더더기가 없어 깔끔하다.

‘구당서’뿐만 아니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도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금 꽃으로 장식하였고, 6품 나솔(奈率) 이상의 관리들은 은 꽃으로 장식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우리 기록이 더 구체적이다. 그러니까 이런 은제관식은 백제의 높은 관리들이 썼던 관식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의 왕과 고급관리 등 정치적 지배자들은 몸과 정신에서 발산하는 기(氣)를 이처럼 영기화생의 모양으로 형상화해 비단 관에 장식했다. 왕의 것은 비단 관 좌우에, 고급관리들의 것은 비단 관 정면을 장식했다. 물론 왕 및 왕비의 것은 순금으로 더 화려하게 더 역동성 있게 표현하여 왕의 권위를 극대화했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백제 왕관의 모양이 밝혀졌으나 모든 왕관이 같은 형태였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고급관리의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같은 모양이어서 별로 변화가 없었던 듯하다. 이에 비해 고구려의 왕관은 발견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강우방 이화여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