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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화 두소리]‘달콤한 인생’을 보고

입력 | 2005-04-19 16:29:00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던가. 러시아 제 슈테시킨 총구가 작렬하고, 사내들이 피범벅이 되어 죽어가는 ‘달콤한 인생’은 과연 김지운 감독 자신이 꿈꾸었던 것처럼 ‘한국 최초의 누아르 액션’으로 자리매김 한 것인가.

‘한 영화 두 소리’의 부부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와 남완석 교수(전주 우석대)가 ‘달콤한 인생’이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 스타일리시하지만 스타일이 없다

▽심영섭=김지운 감독은 한국 감독 중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에게 자기의 스타일은 없어. 허진호 감독이 스타일리스트는 아니지만 스타일이 있고, 박찬욱 감독이 스타일리시하면서 스타일이 있는 것 하고는 대비되지.

▽남완석=스타일을 영화의 주제나 형식적 측면에서의 인장(印章)이라고 해석한다면 그건 너무 작가주의적 개념 아닐까. 난 김지운 감독이 자기 스타일이 없는 게 아니라, 형식상 여러 장르를 실험하고 있기 때문에 일관된 스타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해.

▽심=문제는 그 실험에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거야. 늘 어디선가 본 듯하지 않아? 이 작품 역시 장 피에르 멜빌의 차가운 누아르와 일본 스키세이 준 감독의 뜨거운 누아르, 홍콩 누아르를 섞어 놓은 듯한 작품이지.

▽남=하지만 흰 욕조에서 서서히 흐르는 피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고딕 스타일의 벽지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의 공포는. 얕은 무덤을 파서 곤경에 처하는 생뚱맞은 유머는. 그건 모두 ‘김지운적(的)’이야.

▽심=그래서 정교한 세트에 갇힌 ‘청담동 명품’ 영화들이잖아. 내가 볼 때 이번에 김지운 감독은 총이 있는 누아르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 총은 칼에 비해 속도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저우룬파(周潤發)가 쌍권총을 난사할 때처럼 속도감각의 변주를 통한 액션의 쾌감도 가능하고….

▽남=총을 통한 액션을 도입했다는 것 자체가 누아르풍 영화에서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해. 나는 그 점에서 이 영화에 80점은 줄 수 있다고 봐.

▽심=후하네. 난 쿨한 허무주의적 누아르가 되기에는 캐릭터의 내면과 형식의 상호침투가 일어나질 않았다고 보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선우(이병헌)와 희수(신민아)의 미스 캐스팅 때문이라고 봐. 이병헌이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감독이 너무 내면이 맑아 보이는 사람을 골랐다는 거지. 이 영화에선 내면이 안 들여다보이는 배우를 골랐어야 해. 그건 배우 잘못이 아니라 배우를 고른 감독 잘못이야.

○ 매혹, 그 자체에 매혹되는 달콤한 순간

▽심=보스의 애인인 희수 역시 그래. 피범벅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인물인데, 그런 존재감이 안 느껴져. 한번 봐서 인생이 흔들릴 정도의 여자여야 하는데 도무지 그런 실감이 안 난다고….

▽남=난 그 견해에는 반대야. 희수가 주는 이미지가 인생을 바꿀만한 아우라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해. 선우는 한 여자 때문이 아니라 매혹의 순간, 그 자체에 매혹 당하는 거니까.

▽심=난 그 견해에 대해 완벽히 반대해. 이 영화의 중대한 주제인 매혹과 꿈에 대해서도 김 감독은 시종일관 차창이나 유리에 반사되는 이미지로 선우의 내면을 보여줘. 그게 감독의 자아도취야.

▽남=자아도취라기보다는, 자신의 성에 갇힌 사나이의 외로움 아냐? 이 영화에 유난히 도심의 야경이 자주 나오잖아. 특히 선우가 야간에 차를 달릴 때보면 카메라를 차의 보닛 위에 올려놓고 찍은 장면도 있어. 화면 자체가 휘거든. 그 밤에 도시를 돌아다니는 게 마치 선우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을 줘. 나는 그런 장면에서 선우의 내면이 충분히 설명됐다고 생각해.

▽심=그런 걸 표현할 줄 아는 감독이니까 안타깝다는 거야. 예를 들어 선우가 갖고 있는 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스탠드를 껐다 켰다 깜빡깜빡하는 장면이 있어. 그런 연출은 아주 탁월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구원 없는 지독한 세상의 느낌이 오지 않아. 마지막 장면을 보면 선우가 정말 킬러인지, 호텔지배인인 선우가 킬러의 꿈을 꾼 것인지 분명치 않잖아. 언제라도 유리알처럼 깨질 수 있는 삶의 허무를 더 관객의 입장에서 보여줬어야 했어.

○ 김지운식 웃음이냐, 장르영화냐

▽남=그래서 마지막에 바 뒤편에 숨어 있는데 유리가 와장창 박살나는 것 아냐?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반들반들한 외면. 그 장면 꼭 ‘스카페이스’를 보는 것 같아. 이건 홍콩 누아르의 발레하는 듯한 액션과는 다른 그야말로 ‘벌거벗은 폭력’이거든.

▽심=난 그런 것보다는 감독이 이야기 구성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해. 영화가 강 사장(김영철)과 선우의 애증과 배신에 대한 이야기라면 좀 더 여기에 집중해야 했어. 주연급 배우들이 빚어내는 증오와 회한 같은 정서의 밀도가 떨어지니까 얘기가 산만해져. 백 사장(황정민), 무기밀매업자 명구(오달수), 백상파 암살자 오무성(이기영) 같은 훌륭한 조연들이 많이 나오는데도 그 인물들의 장점을 수렴해내는 중심 이야기가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남=난 오히려 그런 코믹한 상황이나 인물 설정을 다 걷어내 버렸으면 어떨까 싶어. ‘장화홍련’을 만들었을 때처럼 김지운 특유의 코믹성을 다 빼버리고 차라리 장르적 특성에 집중하라는 거지.

▽심=안 되지. 차라리 난 김 감독이 다음번에는 꼭 코미디를 만들었으면 싶어. 그는 정말 무심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웃기는 묘한 재주가 있어. 그걸 좀 더 밀고 올라와 봤으면…. 배우들은 아예 무명 배우를 써도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해 봐.

▽남=아니라니까…. 난 ‘달콤한 인생’에 허무가 부족했다면 그건 오히려 ‘김지운 표 영화’의 흔적이 더 남았기 때문이라고 봐.

▽심=어떤 선택이 더 나을지는 누구도 장담 못하지. 어쨌든 이젠 김지운 감독이 화려한 세트, 반짝거리는 소품, 스타 시스템 다 때려치우고 자기 본질에 충실했으면 좋겠어. 김지운 감독 이러다간 군웅할거하는 감독들 틈에서 ‘낙원의 저편’에 있는 감독이 된다고.

정리=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