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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한국 여성이 일을 저지른다

입력 | 2005-03-30 18:46:00


말이 많은 건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징후다. 저마다 한마디씩 입방아를 찧고 있는 나라의 정치가, 외교가, 경제가 그렇다. 나라도 그런 데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국태민안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울한 정치 외교 경제에서 잠시 눈을 돌려 보면 우리의 내일이 어두운 것만도 아니다. 아시아 각국에 번져 가고 있는 대중문화의 ‘한류’뿐 아니라 고급문화의 한류도 이미 유럽 미국에서 일기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지난 10여 일 동안 현대음악의 ‘진은숙 현상’을 목도하고 체험하고 반추해 보는 기쁨에 뿌듯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 진은숙의 이름을 들은 것은 1985년 말, 그의 스승인 강석희 교수가 꾸려 온 13회 ‘범(汎)음악제’에서였다. 진은숙은 그때 유럽에 건너가자마자 20대의 나이에 ‘가우데아무스’ 작곡대상을 타게 됐다는 소식이 음악제 개막일에 급히 알려져 작은 선풍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10년 후 베를린으로 이사한 직후 그곳서 만나고 다시 10년 만인 이번엔 한국서 재회한 것이다. 통영의 국제음악제 무대에서, 그리고 서울의 금호음악당 무대에서.

▼현대음악의 ‘진은숙 현상’▼

베를린에서의 10년은 진은숙에겐 매우 뜻있는 수확의 연대였던 듯싶다. 이 무렵 1년에 고작 1편쯤을 쓴다는 과작(寡作)의 작곡가가 발표한 작품마다 음악 세계는 주목을 했고, 만년 소녀 모습의 이 ‘피트라(피터의 여성 이름) 팬’에겐 어떤 남성 노장도 타기 어려운 큰 상들이 수여됐다. 1993년 첫 오케스트라 작품 ‘산티카 에카탈라’로 일본 작곡 경연의 1등상, 1998년의 전자음향작품 ‘시’로 부르즈 음악상을 타더니 2002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콘체르토’로 마침내 음악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그라베마이어 작곡상’ 수상이라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금년엔 제3회 쇤베르크 작곡상 수상까지….

그라베마이어 음악상이 어떤 상인가. 세계의 음악상 가운데 최고의 상금과 영예를 얻게 되는 이 상의 역대 수상자를 보면 20세기 폴란드가 낳은 두 거장 루토슬라브스키(1913년생)와 크리스토프 펜데레츠키(1933년생), 진은숙의 스승인 헝가리 출신의 죄르지 리게티(1923년생), 그리고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고(故) 다케미쓰 도루(1930년생) 등 모두 60, 70대의 노장이다. 2001년 금세기 들어 최초로 수상한 뉴욕 필하모니 총감독 출신인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 피에르 블레즈(1925년생)도 수상 당시 나이가 76세였다. 그러한 대상을 40대 초반의 한국 여성이 거머쥔 것이다.

이 만년 소녀처럼 겁을 모르는, 경계도 모르는 ‘피트라 팬’(실례!), ‘어떤 실험도 마다않는 이 월경인(越境人)’ 진은숙의 음향 세계는 사람의 소리, 악기의 소리, 전자음향이 조작한 기계의 소리 등이 풍성하게 혼효하는 낯선 세계다. 그럼에도 그것은 컬러풀하면서 투명하고, 날씬하고 경쾌하며, 그래서 나 같은 문외한이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기조차 하다. 작곡의 소재를 수학의 숫자놀이, 자연의 조화, 또는 미하엘 엔데, 루이스 캐럴 등 문학의 세계에서 따왔기 때문일까.

▼40대 초반에 거장 반열 올라▼

그녀가 심취하고 있는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진은숙은 아무래도 또 한번 큰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다. 2007년 여름 뮌헨의 오페라 페스티벌은 그녀가 작곡 중인 그랜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 초연으로 개막 공연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노장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69세에 작곡한 유일한 오페라 ‘탕아의 편력’을 포함해 현대 오페라는 거의 대부분 난삽하고 재미가 없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까지 즐겨 들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현대 오페라는 청중을 되찾게 되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1907년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여자들’과 아널드 쇤베르크의 12음계 음악으로 20세기가 막을 올린 것처럼 포스트모던의 여성과 젊은이의 세기인 21세기는 2007년 진은숙의 ‘앨리스’로 막을 올리게 되지 않을까. 나는 즐거운 꿈을 꾸어 본다.

최정호 객원대기자